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요한복음 6장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생명의 떡(요 6:1-71)

성령의 능력 2021. 12. 1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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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먹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 예수님의 복음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요 6:1-71)

 

1-15, 떡과 물고기 기적

[1-3]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그 후에라는 말(메타 타우타)[이 일들 후에]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을 나타낸다. 5:1유대인의 명절을 유월절로 본다면, 1년의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을 말한다.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눅 5:1)라고도 불리었다. 그 바다는 남북으로 약 20킬로미터, 동서로는 가장 먼 곳이 약 12킬로미터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9:10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새다 동네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동쪽 해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큰 무리가 그를 따랐다. 그것은 그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9:11은 예수께서 그를 따라온 무리를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병 고칠 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지 않고 몇 가지만 자세하게 기록했으나, 본문이 암시하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8:16; 9:35; 20:30; 21:25).

[4-7]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떡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전도사역 기간 중에 맞으신 세 번째 유월절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던 것 같고, 그 이유는 전후 문맥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요한복음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께서는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셨지만,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떡에 대해 말씀하셨다. 빌립은 각 사람이 조금씩 받을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2백 데나리온은 2백명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8-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아이라는 원어(파이다리온)는 ‘어린아이라는 뜻이다. 한 어린아이가 안드레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주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그 떡이 보리로 만든’(크리디노스) 떡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물고기도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냥 물고기(이크뒤스)가 아니고 작은 물고기’(옵사리온)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좀더 생생한 증거이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팠을 터인데 그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런 큰 믿음의 행위에서 일어났다.

[10-13]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마가복음 6:39는 그곳에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가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5천명쯤 되었다. 마태복음 14:21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무리의 전체 수는 약 6천 내지 7천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떼어주시는 떡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떡을 바친 어린아이가 만일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다면 그는 무릎을 치면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였을 것이다. “! 내가 바친 그 떡과 물고기가 줄어들지 않고 예수님의 손에서 자꾸 나누어져 나온다!” 그는 집에 돌아간 후에도 그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날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먹는 음식이 남았다고 그냥 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음식을 먹은 후에는 앉았던 장소라도 깨끗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같다. 믿는 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는데,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그 저녁에 주께서 행하신 떡 기적은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게 한 풍성한 기적이었다.

[14-15]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 선지자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18:15). 사람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그의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셨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였던 것 같다. 사회적 평안과 물질적 유여함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은 죄 문제이다. 죄는 불행의 근본 원인이다.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참 평안과 행복이 없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를 떠나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가 거기에서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마 14:23; 6:46).

예수께서 행하신 떡과 물고기 기적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네 권의 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을 뿐 아니라, 풍성한 기적이었다. 주께서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하셨다.

떡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사람으로서 이런 기적을 행한 자가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기적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육신적, 물질적 차원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에 있었다. 그는 그를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무리들을 피하셨다. 그는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고 그보다 더 근원적 문제인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교회는 단지 세상적 유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진리의 교훈 안에서 양육하기 위해 존재한다.

16-29,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16-18]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갈릴리 바다 북동쪽의 벳새다 언덕에서 떡 기적을 행하신 후 날이 저물었고 예수께서는 혼자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갔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는 중에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 그들은 큰 바람과 풍랑으로 인해 괴로이 노를 저으며 고난을 당하였다. 바로 몇 시간 전 놀라운 떡 기적을 보며 기뻐하였는데 그 밤에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고생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떡 기적으로 가슴 부풀었을 제자들이 큰 바람과 풍랑으로 두려워하며 당황하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이다. 제자들은 이런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쉽고 안이한 삶을 살지 않고 기쁨과 슬픔, 평안과 고난을 번갈아 만나게 될 것이다.

[19-21]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은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갔다. ‘십여리’라는 원어는 ‘25 내지 30스타디온’이라는 말인데, 5-6킬로미터의 거리이다. 그때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때가 4경쯤이라고 말하는데, 4경은 새벽 3-6시이다. 아마 제자들은 큰 바람과 파도와 씨름하느라고 여러 시간을 소비한 것 같다. 그 힘든 시간에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이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바다 위로 걸어오는 물체를 보고 두려워하였으나 그가 예수님인 줄 확인하고 그를 기쁘게 영접하였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 말라.” 그들은 기뻐서 그를 배로 영접하였고 배는 곧 그들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확실히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역사상 바다 위로 걸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몹시 힘들어하던 그 밤에 비상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기적이 확실함은, 첫째로 그 밤에 제자들만 배 타고 떠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둘째로 제자들이 10여리쯤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는 사실과, 셋째로 제자들이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넷째로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 기쁘게 영접했다는 사실 등에서 분명하게 증거된다. 그 밤에 그 배에 탔던 제자들은 다 이 사건의 증인들이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14:33). 떡 기적과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2-25]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그의 제자들이 탔고](전통본문)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본문은 예수께서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실 수 없었고 오직 바다 위로 걸어서만 가실 수 있었음을 증거한다. 디베랴는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 중부의 도시이었다. 무리가 거기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자기들의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그를 만났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찾고 그에게 나아오려는 열심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온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동기로,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바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人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人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과 마음을 지적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단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늘도 그런 기적의 떡을 먹을 것을 기대하며 온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떡은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결국 다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부귀영화와 그 모든 즐거움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요일 2:17). 사람은 떡을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결국 늙고 병들고 쇠하고 죽고 만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허무한 데 두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도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물질의 복이나 육신의 건강과 행복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것들은 썩는 양식이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고 결국 다 없어지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영원하시며 그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17:3; 벧전 1:23-25).

[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누구든지 그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무엇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인가?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그러하다고 말씀하셨다. 구약성경 전도서가 강조해 증거한 대로, 세상의 모든 것, 곧 해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하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벧전 1:24-25).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교훈대로(요일 2:15),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인 줄 알고 성경말씀을 사모하고 귀히 여기며 힘써 믿고 그 명령과 교훈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첫째로 여기며 믿는 일을 가장 크게 여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매우 귀히 여기고, 또 성경말씀 받는 일을 매우 귀히 여기며 사모하며 힘쓰자.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믿음의 일, 말씀 순종의 일, 성화를 이루는 일은 영생에 이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일을 첫째로 귀히 여기며 믿음과 순종의 일, 그리고 성화의 일을 위해 힘쓰자.

30-40, 내가 곧 생명의 떡

[30-31]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벳새다 들판에서 기적의 떡을 먹고 그 다음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모여온 무리에게 예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 즉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시자(6:27-29),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들의 질문에는 여전히 떡 기적 같은 물질적 기적을 구하는 기적주의적 생각이 있어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리가 그를 믿을 만한 어떤 표적이 있는가?” 물론, 성경에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들을 사람들에게 주셨고 그것들을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를 확신할 수 있다.

[32-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떡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사람은 날마다 떡을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않은 떡,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에 대해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그 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물질적 떡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었다.

[35-3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가? 그것은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에 온 것이다. 죄가 없는 천국에서는 죽음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대속(代贖)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10:4) 이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의를 입혀주심으로써(3:24) 그를 믿는 자들이 죽지 않고 살며 죽어도 다시 살게 하셨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마르면 결국 죽지만, 예수께 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떡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를 눈 앞에 모시고도 그를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은 왜 생명의 주를 보고도 믿지 않는가? 사람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관련된 한 진리를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표현은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됨을 증거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주시는 자들이 주께로 올 것이며 주를 믿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자들을 실제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말씀은 구원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 제한된 자들의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선택의 진리를 보인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는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멸망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택함을 받은 자들, 그 제한된 수의 사람들은 다 예수께로 올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가 없을 것이다. 또 그 구원은 불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또 완전하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증거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결코 거절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었다.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택한 백성을 다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구원을 얻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반복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곧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그를 믿을 것이며 그들은 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것이며 또 마지막 날에 다 영광스러운 몸, 곧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할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일시적인 것들, 곧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돈이나 세상 영광이나 육신적 쾌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썩어질 것들이며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썩어지고 없어지는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것 곧 천국과 영생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부활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보내 주신 생명의 떡이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 곧 만세 전에 선택된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올 것이며 그를 믿을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려두셔서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며 마지막 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고 이 생명의 떡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욱 굳게 서자.

41-51,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

[41-42]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앞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즉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을 나타내고, 또 그가 단순히 땅에 속한 자 즉 인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 즉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는 요한복음 초두에 증거한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자’(1:14) 즉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한다고 수군거리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어릴 때부터 보았던 한 인간에 불과하였고 그의 부모도 잘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를 신적 존재로 인정할 수 없었고 수군거리는 죄를 범하고 있었다(1:29).

[43-44]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구원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께로 올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미니안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맞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경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구주이시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시작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우리를 이끄실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께로 나올 수 없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신적 구주이신 그가 친히 부활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한없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장차 심판의 때가 있는데, 그때 믿는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을 것이다. 육신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성도들에게는 복된 부활이 있고 그 후에 영생이 있다. 성도의 영생은 다시 죽지 않는 복되고 영광스런 삶이다. 이 부활과 영생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복된 소망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13).

[45-46]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그러므로](전통본문)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말을 구약성경 이사야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거나 육신의 귀로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심으로 심령으로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신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온 자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믿는다. 우리는 그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즉 하나님에게서 온, 신적 구주이심을 믿는다.

[47-5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전통본문)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떡은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떡을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으나 그들도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 즉 신적 인격인 떡이시며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떡이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떡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앞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소유하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었다(5:24).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가 줄]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본장에서 여러 번 자신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32, 41, 42, 50).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암시한다. 그는 땅에 속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신적인 구주, 곧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시다. ‘산 떡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즉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의 택한 백성의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온 자이시다. 그는 이 땅에,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시고 하늘로부터 오신, 하늘에 속하신, 본래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신 분, 즉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놀라운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끄실 때 구주 예수께로 나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은 그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그에 의해, 또 성령에 의해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 자신의 죄인 됨과 구주 예수님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만일 그가 이끌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저 유대인들처럼 수군거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거절했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영생의 구원은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 영생을 얻은 것을 가장 큰 행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한다. 또 이 구원에 무엇을 더할 것이 없는 줄 알고 항상 만족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답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믿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52-59, 속죄 신앙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는 앞절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살을 줄 것이라고 암시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곳에는 일치와 단합이 있지만,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의견 충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말하였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人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그의 말씀의 진리성을 한번 더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자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의 영과 육체를 가진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질을 가지셨으므로 물질적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하여 주신다는 말씀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실 것을 암시한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19-20). 그것은 구약 제사 제도를 생각하게 한다. 구약의 짐승 제물은 피를 흘려 죽고 불태워졌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 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는 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원리이다(17:11).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그의 십자가의 속죄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매우 강하게 들리지만,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 곧 속죄 신앙을 가리켰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 음식이 우리의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듯이, 우리가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신다. 속죄 신앙은 성찬식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성찬식에서 우리가 먹는 떡과 마시는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을 때 성찬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속죄 신앙은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실 때 바르게 표현된다.

성찬식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의 길이다. 속죄의 주님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믿음이다. 속죄의 주님이 없이는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참 믿음은 속죄 신앙이다. 속죄 신앙은 영생에 이르는 신앙이다. 속죄의 주님을 믿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참으로](전통본문)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참으로] 음료로다.

속죄 신앙을 가진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신자도 불신자처럼 죽어 장사되지만 신자는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심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다(고전 15:51-52).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양식과 음료는 우리를 죽지 않게 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는 양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양식과 음료이시다. 세상의 모든 양식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는 양식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시는 양식이다. 이 세상에 영생의 양식과 음료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께서는 또 영생의 이치를 연합의 원리로 보충하여 설명하셨다. 그는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안에 거하고 그도 저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연합의 관계를 묘사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이런 연합 속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그로 인하여 생명을 누리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 즉 그를 믿는 사람은 그로 인해 살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58-59]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시다. 그는 신적인 떡이시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고 영생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신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떡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후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이었다. 그 기적과 그 말씀의 내용은 제자들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행하신 기적이며 그가 친히 그 입으로 하신 진실한 말씀이며 확실한 진리이었다.

본문의 진리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영생의 양식이시다. 밥과 물은 우리로 죽지 않게 못하는 양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시다. 그가 우리의 참 양식과 음료가 되시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통해서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신 의()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에게 영생의 양식이시다.

둘째로, 사람에게는 복된 영생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영생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주셨다. 인간의 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영생과 부활에 있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다.

셋째로,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을 얻는다(3:1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다(요일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신적 구주의 대속(代贖) 사역을 믿는 것, 곧 속죄 신앙을 가리킨다(3:21-25). 속죄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복된 신앙이다.

60-71,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60-62]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중에 여럿이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말씀은 그들에게 걸림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생기는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은 불순종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그의 말씀의 진리성을 좀더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천국에 있었다는 사실과 또 얼마 후에 자신이 이전의 있던 곳으로 올리울 사실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이시라면,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없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 곧 신적인 인격이시므로 그의 말씀은 진리이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살리시는 자는 성령이시니](NASB, NIV)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말들](원문)이 영이요 생명이라.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물질적인 떡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살리시는 일에 대해 말한 것임을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육은 본래 생명이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산 자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영혼이 죽었다. 그 죽은 영혼은 육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으로는 다시 살릴 수 없다. 육은 무익하다.

예수께서는 신적 영과 인간의 영육이 결합된 자이시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피 흘리심은 대속(代贖)의 가치를 가진다. 그의 신성이 그 고난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 죽음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고 그 죽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능력도 무한하다. 그의 영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다. 그는 그들을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한 그의 말들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신과 동일시된다. 그의 말씀들은 영 곧 생명 원리이며 사람들에게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실상 생명 자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은 그의 신성(神性)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이실 뿐이라면, 그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며 사람을 살릴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말씀은 생명이 되는 것이다.

[64-65]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그에게 주여, 주여하고 말한다고 다 믿는 자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나온다고 다 믿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다 아셨다. 그는 실상 태초부터 그들을 다 아신다. 이 지식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종말의 일을 태초부터 말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46:10). 제자들 중에도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그를 배신할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람이 예수께 나올 수 있고 그를 믿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다(9:16). 그가 긍휼로 택하신 자들만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66-69]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전통본문) 믿고 알았삽나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결국 나뉠 것이다. 쭉정이와 알곡, 곡식과 가라지, 양과 염소, 즉 중생한 자와 중생치 못한 자는 나뉠 것이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수를 비교하면, 구원받은 자는 다수가 아니고 소수일 것이다. 중생한 자만 주를 끝까지 따를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갈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의 주요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핵심적 이유는 그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생이 있고 그에게만 영생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요 곧 영생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14:6).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다른 길을 인류에게 주신 적이 없다(4:12).

[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시몬의 아들 가룟인 유다](전통본문)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마귀라는 헬라어(디아볼로스)는 ‘훼방자, 배신자라는 뜻이다. 과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하고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유다는 주 예수의 모든 말씀을 들었고 모든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성을 확인할 모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배반했다. 여기에 사람의 심각한 무지와 완고함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진리가 있다. 또 물질에 대한 욕심은 그의 무지의 한 원인이었다.

본문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믿는 자는 어떤 자인가? 믿는 자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 즉 그의 신성(神性)을 믿는 자이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승천으로 장차 확증될 것이다. 그의 신성의 영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신적 구주이신 예수께 영생의 말씀이 있고 그에게 영생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은혜를 주지 않으신 자는 아무도 예수께 나와 그를 믿을 수 없으나, 그가 은혜로 택하신 자는 그를 믿을 수 있다. 또 그를 믿은 자들만 끝까지 그를 따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를 따르는 것 같은 자들 가운데 그를 믿지 않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 말씀을 어렵다고 수군거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적 구주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갈 것이다. 그들은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6장 예수님의 말씀] 12제자를 임명하심(눅 6:1-49)

 

[누가복음 6장 예수님의 말씀] 12제자를 임명하심(눅 6:1-49)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심으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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