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누가복음 10장 하나님 말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25-37)

성령의 능력 2020. 10. 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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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0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본문 눅 10:25-37

 

설교 내용

지난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성경에 나타난 비유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졌고, 많은 영향을 끼친 비유 가운데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심지어 이 비유는 불신자들까지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그의 물건을 강탈당하고 상해를 당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고 어떤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예를 들어 말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뜻은 아주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에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것처럼 행하면 되고,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성경학자이기도 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이 비유는 대단히 어려운 비유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 비유는 많이 왜곡하여 해석해 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고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예수님으로, 강도 만난 자는 여행자로서의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유적인 해석 방법으로 사마리아 사람이 상처에 부은 기름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주막은 교회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 성경말씀은 한 본문은 한 개의 메시지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9항). 만약에 성경말씀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본래의 의미를 버리고 상징으로만 이해한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의 관점과 주관에 따라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경향으로 빠지는 경우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이 중세 교회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교회가 성경 해석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요인도 많이 있었지만 교회의 결정이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이 점이 교회의 부패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영생을 얻은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한 질문, 두 번째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내용, 세 번째로는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동기 :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한 질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 비유 자체적으로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대부분 그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셨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역시 문맥에서 볼 때 한 가지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은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내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이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이 율법사는 문자 그대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내용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영생을 얻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이라는 말을 미래적인 의미로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헬라어 성경에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는 영생의 개념을 이해할 때 생명을 수식하고 있는 "영원한"이라는 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생명"에 더 강조점이 있습니다. 생명의 특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생명은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입니다. 생명을 정의할 때 세상의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는 성경이 생명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생명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영생을 아주 분명하게 정의하셨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할 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존재,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전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존재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된 인간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인생의 행복과 의미는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 율법학자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습니까?"라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믿는 신자조차도 우선적인 관심사는 돈과 지위입니다. 돈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생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특히 신자는 이 문제가 그 삶의 기초로 놓이지 않는다면 언제 그가 얻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는다면 주안에서 모든 것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나온 율법사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율법에 대하여 질문함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이 질문에 대하여 율법사는 율법에 익숙한 자답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눅10:27) 이 말씀은 율법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의 말씀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사의 대답을 듣고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10:28)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해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율법을 지켜 행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 문제의 본질을 확인해 봅시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나온 율법사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 율법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행하면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비유의 내용 :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그러나 율법사는 그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하여 한 가지 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9) 이 질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네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강도와 강도 만난 자, 제사장이나 레위인같이 강도 만난 자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강도 만나 자를 보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등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제사장처럼 그곳에 이르러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백성의 지도자였고, 제사의 직무와 함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던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인 역시 성전을 중심으로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특권계층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 지식과는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 곳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도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이요 천한 사람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 약 750년 전에 북쪽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들의 일부는 자기 나라로 이주시키고 또한 앗수르인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북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인들과 통혼하면서 소위 말하는 혼혈족들을 낳았습니다. 이 일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방인이었고 율법을 모른다고 생각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나 위급한 지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오늘날처럼 치료약이 많거나 의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처에 기름을 바르거나 포도주를 붓는 일은 치료의 방법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즉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응급처치를 한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잘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치료하고 돌보는데 비용이 더 필요하면 돌아오는 길에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개인적으로 이 비유를 적용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이 비유에 나오는 율법학자처럼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의 의미는 사랑해야 할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주체자에 초점을 맞추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사랑해야 할 대상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면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주체자에게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내가 자비를 베풀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의 의무의 한계를 긋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즉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참된 이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단순히 가족이나 친척, 또한 자신의 유익과 관계된 사람에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때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구호나 슬로건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돈과 시간 그리고 희생적인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랑을 보이는 사람을 이해해 주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에도 아주 인색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도움을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참된 이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3. 비유의 결론 :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결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앞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질문 때문에 이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하고 중심 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하여 이미 예수님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계명을 알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 그가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산 사람 가운데 이 계명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계명을 완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의 교리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자랑으로 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탁상공론만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시켰습니다. 아마 이들은 율법에 "길가에 거반 죽게 된 사람이 있으면 도우라"는 말씀이 있으면 도왔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토론이나 하며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은 가리켜 종종 외식하는 자(위선자)나 회칠한 무덤 같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을 가지고 있고 이 말씀대로 살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나 누가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0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그러면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다시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4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얻은 자는 율법의 모든 요구,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이 내용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까요? 이 비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온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내용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문제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이 비유는 바로 이 점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비유에서의 율법사처럼 이웃의 범위를 정하려고 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생명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자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희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받은 증거들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제목은 누가 천국에서 이웃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이웃일까요?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배운 학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자에게도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천국에 가게 될 것인지의 문제와 누가 이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몇 달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왔습니다. "너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웃은 푸줏간 주인이다." 학자는 기가 막혀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았는데, 그 이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같이 위대한 학자가 어떻게 푸줏간 주인과 같은 하찮은 사람과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야 하나님이 실수하셨을 거야. 내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아야 되겠다." 그는 푸줏간에서 멀지 않은 여관에서 묵으며 푸줏간 주인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푸줏간 주인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고기를 썰어서 주면서 아이들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느 날 노예를 가득 실은 배가 도착하자 그 주인은 그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처녀가 가난하여 하녀로 그 푸줏간 주인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푸줏간 주인은 가난하여 결혼하지 못하여 하녀로 팔리게 된 것을 알고 모든 결혼비용을 들여서 결혼시켜 주었습니다. 학자는 이 푸줏간 주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을까요?

여러분! 천국에서의 이웃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얻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시간과 돈과 희생적인 수고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러한 사람이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사가 질문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시간과 돈과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사랑을 보이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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