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갈라디아서 1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직 복음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갈라디아 교회가 거짓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해 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나 따르는 자들은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우리는 온전한 복음을 따라야 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을 따를 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따르지 말고 온전한 복음을 전해주는 자들의 말씀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 (갈 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갈라디아서 1:1~24
요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2)
주제: 바른 복음을 전수하여 다른 복음을 청소하고 진리로 거룩함을 받자
오늘은 바울서신 중 교리서신(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해당하는 갈라디아서를 강해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를 요약하고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펼치면 로마서가 됩니다. 주제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입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와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가 중심 말씀입니다.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 교회 개혁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교회의 본질인 복음(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밝히고 있습니다(2:4; 5:1, 13). 로마서가 복음에 대한 차분한 논리적 해설인 반면, 갈라디아서는 변증적인데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 이단에 대항해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며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며 율법주의와 행위 구원론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대 선언이 갈라디아서의 특징입니다. 갈 3:11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서 갈라디아서는 특히 “살리라”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인은 로마서에서, 롬 1:17; 믿음으로는 히브리서에서, 히 10:38, 11장 전체]. 특히 “복음을 전수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1-3장은 교리 부분으로 “복음의 유일성”을, 4-6장은 “성령님의 인도로 자유자로 살아감”이 주제입니다.
갈라디아는 바울의 출생지로, 한 지역이 아니라 소아시아(오늘날 터키)의 큰 주(洲=도道)에 해당하는 곳으로 북갈라디아 지역과 남 갈라디아 지역을 망라합니다(고전 16:1; 갈 1:2; 딤후 4:10). 그래서 갈 1:2에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다고 말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에는 율법주의 이단이 침투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이단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하며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주의 이단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서 복음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서신에서 율법주의 이단을 강하게 정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참 자유에 대해 밝히 증거 합니다. 저술 시기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시 에베소에 머문 3년 중 전반부의 어느 때이든지(AD 54년경) 혹은 마게도냐와 헬라에 머물었을 때(AD 56년경)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문안인사 (갈 1:1-3)
1 (사람들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사람으로 말미암지도 아니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들로부터 그분을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바울은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반드시 ‘사도 apostle(ἀπόστολος)’라고 언급합니다. 사도란 뜻은 “보냄을 받은 사람 one who is sent”라는 뜻인데, 눅 6:13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열두 제자들을 택하여 ‘사도’라고 칭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활절 첫날 저녁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교사의 최초 모형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그의 사도직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에 가까이 가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셨고 그를 택하여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9장). 바울은 또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은 복음 진리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가 믿는 구세주가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부활하셔서 40일간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바로 이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행 1:8) 증인이 되리라(μάρτυρες)는 말과 ‘순교하리라’(martyr)는 단어가 같습니다. 즉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육체적 부활을 증거 하다가 순교라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런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과 일꾼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십니다(마 12:50).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마 28:10).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서신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문안인사는 은혜와 평강(평화)입니다. 은혜(헨, 카리스)는 단순히 마음에 감동을 주고 눈물을 일으키는 감정이 아니라 오직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죄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평강(살롬, 에이레네)은 문제들, 싸움, 갈등, 불안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안정과 평안과 회복을 말합니다. 이것은 죄 문제의 해결, 곧 죄사함을 통해 옵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과 싸움, 갈등과 불안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죄로부터 옵니다. 성도들의 평강은 마음의 평강뿐만 아니라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도 포함합니다.
2. 구원의 복음과 송영(갈 1:4-5)
4 그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며, 그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첫째로,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페리 peri)’라는 말(전통적 다수사본; Byz p46 א* A)은 ‘우리 죄와 관계하여, 우리 죄 때문에, 우리 죄를 없이하기 위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분명히 전하는 복음입니다. 롬 4:25,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 때문에 (디아 dia) 내어줌이 되고.”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휘페르 hyper) 죽으시고.” 죄인은 자신이 자기 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든지, 아니면 누가 대신 그 벌을 받아주든지 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속(代贖)의 이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대신지시고 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인들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며 사람들은 심히 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 곧 그분의 선하고 의로운 뜻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필요합니다. 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일 뿐 아니라, 또한 죽음과 지옥 형벌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영혼들은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구원의 방주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엡 1:4,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 속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질문들의 해답이십니다. 영원무궁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분께’라는 말은 원문에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며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성을 가진 자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찬송의 이유와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찬송가 518장(통 252장)에
(1) 기쁜 소리 들리니 예수 구원하신다. 만민에게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주님 명령하시니 산을 넘고 물건너 온 세상에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2) 바다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들으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섬아 일어나 메아리쳐 울려라.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3) 환난 중에 하는 말 예수 구원하신다. 다시 살아나시어 예수 구원하신다.
지은 죄로 인하여 슬픈 맘이 있어도 숨질 때에 내 할 말 예수 구원하신다.
(4) 바람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기뻐하라 나라들 예수 구원하신다.
구원하는 복음을 산과 들에 전하라. 우리들의 승전가 예수 구원하신다
3. 다른 복음은 없다(갈 1:6-10)
6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바울서신에서 “감사의 말”이 있는데(롬 1:8, 고전 1:4, 고후 1:11, 엡 1:16, 빌 1:3, 골 1:3, 살전 1:3, 살후 1:3, 딤전 1:12, 딤후 1:3) 갈라디아서는 감사의 인사가 없습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실망한 모습입니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셨다’는 말씀은 복음의 내용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은혜의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원어는 ‘내용이 다른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내용과 다른 무엇을 가리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은혜의 하나님을 속히 떠난 것은 교회의 연약성을 보입니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모습과 비슷하였습니다. 신명기 9장에 보면, 이집트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목이 곧고,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속히 떠났습니다(신 9:7, 12-13, 16, 24). 인간의 이런 부패성과 연약성은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있습니다(롬 7:18-25).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오늘 우리도 진리의 하나님을 속히 떠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좇아간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이었지만, 이 교회 속에 다른 복음이 용납된 것입니다. 바른 진리로 무장되지 않으면 이런 가르침이 침투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상 기독교회 안에는 영지주의를 비롯한 다른 복음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도 가톨릭, 각종 이단 종파들, 자유주의 신학, 종교통합, 동성애 등은 다른 복음들입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는 원어는 ‘그것은 다른 하나의(another) 복음이 아니니’입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아무도 복음의 내용을 바꾸거나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내용은 고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요란케 했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의 근원이 사람들임을 보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요란케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복음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속죄의 소식인데, 어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변경시키려고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변경은 복음의 왜곡이며 결국 복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사탄의 활동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들을 어지럽히고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혼란시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대언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요일 4:1).
8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이라는 말씀에서 ‘전한’이라는 단어가 원어(유엥겔리사메다 εὐαγγελίζηται euaggelizetai)는 과거 시제로서 복음이 단번에 전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참 복음은 사도들이 이미 전한 복음, 단번에 전해진 복음입니다. 그 내용은 전파되었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고정되고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시대마다 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복음의 유일성, 고정성(固定性)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바울 자신이라도 변경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오늘날 그 누가 감히 복음의 내용을 변경시킬 수 있겠나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적 복음인 동시에 성경적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종말을 증거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인위적으로 변경시키고 가감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이요 그 근원은 사탄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뜻과 의지와 사역을 방해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일인 것입니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라는 표현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가 새로운 것, 처음하는 것이 아님을 보입니다. 이 정죄는 이전에 이미 했던 것이고 또 다시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 대한 저주를 다시 선언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받은’이라는 원어(파렐라베테 παρελάβετε parelabete)도 과거 시제로서 복음이 단번에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초대교회가 이미 받은 것이요 갈라디아 교회도 이미 받은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성경으로부터 전해온 것, 믿어온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전통적인 것이며 참 신앙으로 진리입니다. 본래 사도들에게 계시되고 사도들이 전파하고 선언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고정되고 확정된 것이어서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거기에서 무엇을 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역사적 신앙, 역사적 기독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받은 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지도자들, 인도자들, 목사들에 따라 변하는 것 같습니다. 양들은 순진하여 인도자들을 그냥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도자들의 책임은 큽니다.
10절.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말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직분자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 변경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변경하는 자들을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일해야 하고 사람 편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4. 바울이 받은 복음을 변증함(갈 1:11-24)
11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리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12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아니하고 배우지도 아니하였으며 다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느니라. 13 과거에 유대인들의 종교 안에 있을 때에 행한 나의 행실에 관해 너희가 들었거니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극도로 핍박하여 피폐하게 하였고 14 내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더욱 심히 열심을 내어 내 민족 가운데서 나와 동등한 많은 사람들보다 유대인들의 종교에서 더 득을 보았느니라.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16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 내가 그분을 이교도들 가운데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실 때에 내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고 17 예루살렘으로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에게로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아라비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노라. 18 그 뒤 삼 년이 지나서 내가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십오 일을 지냈으나 19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보지 아니하였노라. 20 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뒤에 내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들어갔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던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과거에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한때 자기가 멸하던 그 믿음을 지금 선포한다는 것을 듣고 24 나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느니라.
11-12절.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불교나 유교 같은 이방 종교들처럼 사람의 명상과 깨달음, 그리고 양심과 이성적, 도덕적 판단에서 나온 정도의 종교라면, 그것은 유일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지전능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면, 기독교는 이방 종교들과 다르며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절대적 도리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교회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vere homo)이시며 완전한 하나님(vere Deus)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Logos)이십니다(요 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 8:58).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은,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위와 보증을 가짐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도직의 독립성, 정당성, 그리고 신적 권위성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이 복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 되고 기록된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연구하고 믿고 전해야 합니다.
13-14절.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간증합니다. 그것은 무지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과거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 지식에서 나오지 못할 때 오히려 유익보다 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는 단순한 열심보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전에 유대교인으로서 그의 동년배들보다 더욱 열심으로 믿었습니다.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그를 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옷을 지키는 자가 되기도 했습니다(행 7:58).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며 교회를 파괴했던 인물이었습니다(행 8:3).
15-17절. 바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웃 나라 도시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기에서 그는 거꾸러졌고 마침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바울의 어떤 선행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의 은혜이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에 뿌리를 둡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모친의 태로부터 그를 택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모태에서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려고 이미 구별하셨습니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엡 1:4).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를 사도로 삼으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는 그가 받은 사명이 ‘이방인 선교’ 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행 9:15).
구원받은 즉시 그의 열심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의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 원하는 마음의 열심이 끓어올랐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때 이 일을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혈육’은 하나님과 대조하여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또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아라비아로 보내주셔서 3년간 특별한 경건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M.Div 프로그램이 대학 마치고 3년이란 기간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18-19절. 그 후 삼년 만에 그는 게바(베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일을 머물 때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간증합니다. 여기 언급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최초의 총회를 사회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입니다.
2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라고 말한 바울의 말과 기록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거짓 증거는 제9계명을 범하는 큰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진실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21-24절. 그 후에 그는 수리아(시리아 Syria)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그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그들을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殘害)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고 간증합니다. 길리기아는 바울의 출생지인 다소가 있는 지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아 그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회심한 지 3년이 지났고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 짧은 기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고 교제하였으나,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 그를 얼굴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그의 복음 사역은 이와 같이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하신 기이한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그의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던 인물을 불러 구원시켜 그가 핍박하던 그 이름 예수님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되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 합니다. 첫째, 그는 회심 직후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도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는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셋째, 그는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넷째, 그는 그때에도 단지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었을 뿐입니다. 다섯째, 그는 그때에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섯째, 이 모든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닙니다. 일곱째, 그가 회심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도 그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바르게 전합시다. 대언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마 13:53-58)처럼 바울도 고향 길리기아가 속한 갈라디아 지방에서 사도로 인정받지 못해, 이곳에서 자기가 사도된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변호입니다. 그는 자신이 참된 사도이며 그가 전한 복음이 주 예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복음, 곧 하나님의 진리임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으며, 우리는 이 복음과 배치되는 모든 다른 복음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오직 이 속죄의 복음만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고 그것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합시다.
[오늘의 기도]
은혜와 평화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귀한 복음을 깨닫게 하시며 복음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살게 하시며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구원의 소식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하시며 오늘날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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