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 2서 설교말씀 중에서 사랑과 진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랑과 진리
성경 본문: 요이 1:1-6, 시 85:7-13
제1공화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정치가들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저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진실이 없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치가 이와 같이 신실하지 못한 까닭에 오늘 이 땅에서 신뢰심과 사랑이 모두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깊은 증오심과 불신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가장 큰 장애는 불신과 증오입니다. 저들의 정권이 거짓 위에 세워졌고 진실이란 찾아볼 수 없기에 저들을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 신뢰가 있을 수 없고, 신뢰가 없는 곳에 사랑이 자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일을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남북 정권이 다 같이 진실을 회복하지 아니하고서는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한 것입니다.
불신과 증오! 이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암적인 요소입니다. 대학 사회마저 이 암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권위와 신뢰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오늘에 와서는 진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존경하고 사랑할 대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 조차도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병든 사회를 누가 치료할 수 있을까요? 진리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사회의 불신과 증오를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우리가 사랑과 진리를 이 민족 속에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이 행동화된 것이다
성경에서 "진리"라는 말은 공고, 안전, 신실, 확고부동을 뜻합니다. 확고하고 안전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그가 인간 생활 속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특징을 나타내는데 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시편 31편 5절에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스스로 신실하시고 자기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신자들 편이 되어 주시고 친히 간섭하셔서 신자들을 위협하는 불안정에서 구출하시고 새 기반을 닦아 생존의 터를 만들어 주시며 미래의 소망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삼하 7:28, 요 17:17).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서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함이 없다는 뜻에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시고자 오셨고, 그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진리란 결국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확고 불변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거짓에 속아서 잘못된 길로 나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여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참 안전과 생명을 줄 수 없는 우상에게로 이끌리는 인간들을 그 파멸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므로 그는 자신이 진리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의 사랑이 거짓이 아님을 확증하심으로 그 자신이 진리이심을 나타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결같이 나타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신 일 이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에 기초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가 빠져버린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다"(12:9)고 말씀한 것도 바로 사랑은 행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뜻한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할 때만 효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불신의 사회를 치료하는 길이나 남북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할 때 진리가 나타나게 되고, 진리가 나타나면 거짓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반도에 거짓이 활개를 치는 까닭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가 되려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말로만 복음을 전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이끌려 진리를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예언자만을 보내셔서 '생명의 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가 진리임을 확증하심으로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몰아내시고 빛과 사랑의 세계를 이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에서 모든 거짓과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앞장서서 몸으로 이 모든 거짓과 부딪쳐 가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그 복음이 진리가 되고 그 진리가 이 땅에서 모든 거짓을 몰아내게 될 것입니다. 불신과 증오의 치료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부을 때만 가능합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결국 희생을 뜻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날뛰는 자식을 치료하는 길은 부모의 끝없는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병든 대학 사회를 치료하는 길도 재단과 교수들의 인내와 사랑으로 학생들을 감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늘의 병든 정치를 치료하는 길도 국민들이 그 거짓된 정치로 인하여 오는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 사랑을 통하여 저들의 거짓을 계속 들어내는 길 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공장이 쏟아내는 폐수를 우리가 마시고 죽어가므로 인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 사회 전반에 일어나게 하는 길 밖에는 이 환경오염을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불신과 증오의 두터운 장벽으로 막힌 남북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길은 정권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서로가 거짓말하는 사람들끼리 앉아 아무리 대화를 하여도 거기에 진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이나 쌀 교역 같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가장 좋은 통일의 운동이 될 것입니다. 불신의 벽을 허무는 길은 일방적으로 희생적인 사랑과 신뢰를 보내는 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 사랑의 손길을 펴 나가는 곳에 점진적으로 신뢰가 회복되고 사랑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거짓 위에 세워진 김일성 정권이 아무리 든든하게 철의 장막을 쌓았다 하더라도 진리 앞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든든하던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의 믿음 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처럼 저 거짓의 철벽도 결국은 진리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남북한 정권의 모든 거짓을 우리의 사랑과 진리로 무너뜨리는 날 통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불가분의 관계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진리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과연 우리 안에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요한 1서에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4-5)
이 말씀은 우리가 믿노라 하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거짓말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은 사랑과 진리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서신들입니다. 요한 2서와 3서에 보면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그들이 사랑을 행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2서 4절에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서신에서 계명은 곧 사랑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표현하므로 그것이 같은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모든 삶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른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실하다든지 진실한 사람이든지 하는 말이 다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 변화되어 깨끗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맑게 만드는 삶입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사랑에 이르게 마련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써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나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이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사랑 없는 진리는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자부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진리의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리는 있었지만 사랑이 없으므로 해서 그 진리 자체가 왜곡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진리는 율법의 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지시하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저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문자에 사로 잡히거나 교회법에 붙잡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므로 해서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의 생활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닌 한낱 지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오염의 원인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샴푸도 쓰고 일회용 컵도 사용하며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환경오염의 정화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진리로 바꾸는 사랑의 삶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함께 역동적인 것이므로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성경공부가 우리의 지식을 많이 향상시켜 주는 데는 크게 기여를 했지만 진리를 행하는데 까지는 이끌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배운 지식을 사랑으로 발동을 걸어 그것이 진리가 되게 하는 훈련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지식을 추구했지 진리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자, 사랑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불신과 증오로 얼룩진 사회 속에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전하여 이 사회를 치료하여야 하겠습니다. 진리만이 이 사회 속에 퍼져 있는 거짓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진리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거짓과 어둠으로 덮였던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오심으로 해서 그 거짓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와 빛의 세계를 이룩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사회 속에 성육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희생의 제물이 될 때 비로소 우리가 가진 복음이 진리가 되어 거짓들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 사랑도 진리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제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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