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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산상수훈 성경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성령의 능력 2022. 8. 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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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5:3)

예수님이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의 소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사람들에게 부는 행복에 이르는 길, 가난은 세상의 비참의 기초가 되는 것 같다. 물질의 가난과 영의 가난은 똑같은 것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물질로 부유한 사람은 자족하고 자만하기 쉽다.

좋은 예, 부자 농부의 비유(눅 12:16-21). 이 부자는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하게 자족하였고, 그래서 독선적이었고 자신만만하였다. 그는 예수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심령이 가난함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그의 부족을 깨닫는다. 그는 그가 배워야 할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장차 성취되어야 할 더 큰 일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현재의 성취들을 불만하고 앞에 놓여있는 더 큰 승리들을 미리 내다본. 심령의 부유와 심령의 가난의 차이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에서 발견된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부유하였다.

그는 자기 의견에 완전하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 비유는 그가 하나님에게가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는 그가 얼마나 의로웠는가에 관하여 자랑하였고, 그가 영적 가치들로 부유함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반면에, 세리는 그 자신의 영적 가난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는 그가 그 자신의 부적당을 깨달았기 때문에 응답되었다.

심령이 부자인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가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를 성경을 공부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위한 진정한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그 자신의 판단과 무오성으로 교리적이고 확신적인 경향이다. 그는 교만과 거만하게 된다. 그는 "바리새적"이란 말로 뜻해지는 모든 것으로 유형된다.

이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근본 필요들 중의 하나가 그의 태도에 의하여 방해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가장 위대한 출처들 중의 하나가 성취감이다. 심령의 부유는 성취를 위하여 거의 야망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의 일들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한 한 개선을 위한 여지가 없고, 그들의 개성들은 정체된다 (부진하게 된).

그 반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더 높은 일들에 관한 이상을 가지고 있. 그들은 절대로 만족해하지 않고 자만하지 아니한다. 그들의 태도는 성취를 자극하는데, 그 성취는 행복의 근본 출처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항상 배우고 더 좋은 일들을 위하여 항상 갈망한. 사도 바울은 심령의 가난함을 아래와 같이 모범 보였다. 3:12-16 빌립보서에 있는 중요한 말이 "기뻐하라"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온유함 마 5 : 5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란 말은 불쾌한 뜻을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온유가 줏대가 없고(결단력 없는) 비굴한(천박한) 태도라고,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소원들을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여 그러므로 그들에게 쉽사리 복종하는 겁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쳤던 태도가 아니었다.

온유는 정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온유의 몇몇 예들을 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예는 주님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그는 겟세마네 정원에서 기도로 온유의 훌륭한 예를 주셨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말게 하시고 당신의 것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게 복종시키려 하는 기꺼이 하려 함이 온유이다.

모세는 온유의 다른 예를 준다.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불린 순간부 그는 거의 불가능한 싸움을 싸웠다. 그러나 항상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모세는 그의 임무를 사리의 요구들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였. 한 번의 예외와 함께 항상 그는 그의 자신의 소원들을 하나님의 뜻에게 굴복시켰다. 이것이 온유이다.

온유는 우주가 법적인 움직일 수 없는 믿음 위에 기초된다. 과학자는 온유한 태도로 자연에 와야 한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위하여 자연에 나아오고 그는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위하여 그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들 앞에 그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온유는 우주가 법적인 믿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을 위하여 일하는 믿음이다. 바울은 온유한 태도를 썼다(8:28).

온유는 배우기 쉬운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배반할 많은 유혹들이 있고 법들을 곁에 제쳐놓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특징이다. 온유한 사람은 심지어는 그가 그것을 깨닫지 아니하는 때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는 기도한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심지어 그것이 고통을 뜻할 때에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아픔과 고뇌를 견딘 욥은 온유에 의하여 낳아진 용기의 예이다.

그렇다면, 온유는 행복한 성격의 특징이다. 자기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을 배운 사람은 계속하는 행복을 발견할 것이고 진실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는 대의(큰 목적)에 헌신되고, 그것에 충만하게, 심지어는 그것이 위험을 초래하는 때에도 자신을 전념시킨다.

영적 굶주림 마 5 : 6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좋은 식욕은 보통 좋은 건강의 표시이다. 먹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아픈 것으로 생각된다. 건강한 사람이 나쁜 종류의 음식을 먹거나 또는 불규칙적인 식사습관을 발달시키면 그는 육체적으로 아프게 될 것이. 이러한 사실들은 육체적 굶주림에게는 물론, 영적 굶주림에게도 적용한다. 의에 굶주림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었다. 만일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이상이 그를 흔들어 이런 영의 특성들을 간절히 갈망하지 않게 하면 그는 행복한 것으로부터 멀다.

사람이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할 수 있기 전에 그가 심령의 가난해야 함은 명백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의에 자동적으로 굶주리는 것은 아니다. 영적 음식을 갈망하지 아니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많다. 마치 금식이 사람의 육체적 굶주림을 둔하게 하는 것과 똑같이 영적 금식도 신령한 일들을 위한 욕망을 둔하게 한다. 예수님이 말한 의는 적극적인 덕이다.

그것은 아버지다운 사랑에 의하여 동기 유발된 태도이다. 자녀들의 행복에 공헌하는 방법들을 찾고 있는 부모들의 갈망은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좋은 예이다. 부모들이 찾는 유일한 보상은 채워지는 것이다. - ,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을 보는 것이다. 이 복은 사람들이 신령한 일들을 갈망하게 권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무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에게 그들이 신령함을 위하여 굶주리고 목마름을 얻었을 때만이 행복이 올 것임을 가르친다. 여기서 예수는 신령한 법들에게 순종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것들을 정복하는 사람에게 이익으로 일하여주기 때문이다.

마음의 청결함 마 5 : 8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의와 같이 마음의 청결함은 부정적인 뜻 위에 취하였다. 마음의 청결함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에 관하여 사실이었던 것처럼 마음의 청결함은 부정적인 것보다도 긍정적인 덕에 관하여 더 많다.

청결한 물은 앙금과 박테리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갈증을 풀어주는 좋은 물이기도 하다. 청결한 음식은 독과 오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자양분을 주고 몸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마음의 청결함은 죄와 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랑에 의하여 지배(압도)되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청결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보게 하여 준다. 의심과 불신은 청결한 마음속에 아무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확실히 예수님의 태도이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반석이라고 명하는 것은 베드로의 충동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었었음에 틀림없.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초대교회에서 기둥이 될 잠재적이고 운동성 있는특성을 보았다.

마음의 청결함은 확실히 아버지다운 사랑의 태도이다. 아버지란 항상 자기의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본다. 그는 그들의 불완전함들에 두 눈을 감지 아니하고 그러나 거기에 있는 선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한다. 그는 그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하여 그들을 알고 있다. 마음의 청결함의 반대는 의심과 불신의 태도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격 속에 있는 가시를 찾아내는 것이 쉬움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 대들보가 있다 할지라도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결(약) 점들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히 쉽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의 청결의 부족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결핍 때문 임을 설명하여 준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항상 사람들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고 있고, 그들은 대개 그것을 발견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그들은 마음의 청결이 자연스럽게 뒤따름을 발견할 것이다. 수님이 약속한 보상은 하나님의 시력(이상)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와 함께하는 교제의 강한 유대(결속, 인연)를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동등하게 "경험하다"로 잘 번역될 수 있다 (눅 2:26 참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경험이다. 그는 섬김의 생활 때문에 아는 사이가 되는 어떤 사람이다. 이것은 마음의 청결함에 약속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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