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누가복음 20장 예수님 말씀] 변론하심(눅 20:1-47)

성령의 능력 2022. 5. 9. 08:15
반응형

누가복음 20장에서는 예수님과 율법주의자들 간에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그들은 훼방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율법주의자들은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변론하심(눅 20:1-47)

 

1-18, 포도원 비유

[1-2]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다. 복음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가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복음이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 곧 복음의 내용이다. 특히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代贖) 사역과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복음의 골자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의 권세 혹은 권위의 출처를 질문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나 기적들을 행하실 때나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실 때에 권위 있게 행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단지 그를 비난할 거리를 찾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것 같다. 정말 믿고자 하는 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복음 3:34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7:16-17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요한복음 12:49-50에 보면, 그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10:38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고 증거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로 일하셨다.

[3-8]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임박함과 각 사람의 회개의 필요성을 외쳤다. 거짓 선지자들은 부드러운 말을 했고 심판과 회개를 외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는 표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다 인정한 바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세례는 분명히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것 곧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대답을 회피한 것은 그들의 비겁함을 보일 뿐이었다.

만일 그들이 세례 요한이 참 선지자임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예수님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했고, 또 말하기를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했다(1:29, 32-34).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악함을 아시고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해도 그들이 듣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마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과 같다(7:6). 그러나 예수께서는 포도원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함과 자신의 권세의 출처에 대해 증거하셨다.

[9-12]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은지라.

한 사람곧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 곧 구약교회를 가리킨다. ‘농부들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왕들과 방백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주인이 얻기를 원한 포도원 소출은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 즉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과 이웃 사랑과 선행을 가리킬 것이다. 주인이 보낸 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사랑과 오래 참으심으로 여러 번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으나,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거절하였다.

[13-16]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자기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켰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이신지, 자신의 말과 행위가 어떤 권위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그는 선지자들과 다른 분, 그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者)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자(獨生子)](전통본문)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일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 또 그는 자신을 죽일 그 지도자들의 결말도 증거하셨다. 주인은 와서 그들을 다 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한 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는 구약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 대신 이방인들이 신약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 비유를 듣던 자들은 일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일은 그렇게 진행될 것이다.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는 시편 118:22의 말씀은 메시아의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건축자들의 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머릿돌은 벽을 쌓는 데 기준이 되며 두 벽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돌이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택자들의 죄를 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그는 택함 받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셔서 한 교회가 되게 하셨다. 신약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터 위에 튼튼히 세워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의 구원 사역과 심판 사역을 보이는 것 같다. 어떤 완악한 죄인도 그가 깨뜨리시면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부서져야 하고 우리의 새 사람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다 깨어지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다니엘 2장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고 뜨인[채석된] 돌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신상을 쳐서 부수니 그것은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 그것은 신적 메시아의 복음 사역을 보였다.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켜 의인 되게 하시고 세상 나라가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신다. 온 세상에서 택자들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셨다.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라는 말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자 곧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자이시며(1:14),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자이시며(3:34),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심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분이시며(10:38), 그 안에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시다(2:9).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전도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해주셨다(눅 3:33). 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제자들은 그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눅 9:35).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막 1:1; 20:31).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고린도전서 3:9는 우리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건축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베드로전서 2장은 우리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산 돌같이 영적인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말했다(벧전 2:4-5). 에베소서 2장은 우리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 잘 지어져 가야 한다고 말했고(2:20-22), 에베소서 4장에는 우리가 교회의 목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해지고 범사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했다(4:11-16). 이것이 성화다. 예수 믿는 자들은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19-44, 변론하심

[19-22]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교묘하게 그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정탐자들을 보내었다. 그 정탐자들의 말은 옳은 말이었으나, 그들은 실제로 예수를 그렇게 믿지 않았다.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은 독립을 갈망하며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찬성하면 친(親)로마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며, 그러나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면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머리를 썼다.

[23-26]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왜 나를 시험하느냐?](전통본문)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예수께서는 그의 신적 지혜로 그들의 간계를 아셨으며 지혜롭고 정당하게 대답하셨다. 데나리온은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이었다. 옛 시대의 돈은 그 시대의 정치 상황을 나타내었다. 동전이나 은전에는 그 당시 로마 황제의 얼굴과 글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나타내었다.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한 영토이었으므로 로마의 은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신자는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리가 세상 나라에 속한 국민인 한 우리는 국가가 정한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므로(24:1) 또 우리는 그를 섬기는 백성이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교훈하신 십일조와 감사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민수기 18:21; 신명기 14:22.

십일조는 율법시대의 규례이며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율법은 신약시대에 단순히 폐지된 것이 아니고 완성된 것이며, 구약시대보다 축소되거나 쇠약해진 완성이 아니고 더 풍성해진 완성이다. 즉 구약시대에는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다가 신약시대에는 전체가 다 내 것이 되는 방식으로의 성취가 아니고 오히려 신약시대에는 나의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는 방식으로의 성취인 것이다(12:1; 고전 6:19-20). 그러므로 십일조 정신은 신약시대에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의 헌금은 십일조 이상으로 풍성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고후 8:7).

[27-33]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이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23:8).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비슷하다. 이 세상은 장차 불타 없어질 것이며 모든 사람은 죽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부활과 천국을 믿지 않고 이 세상만 믿으니, 참으로 허무한 자들이다. 그들이 언급한 모세의 법은 수혼(嫂婚) 제도라고 불리는 법으로 신명기 25:5-6에 있다. 이 법은 결혼한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그의 첫 아들로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법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식이 없이 죽는 사람의 가문이 없어지지 않게 하며, 또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에서 오실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진 법이었다고 본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사실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성격도 오해했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 경우에 대해 질문했다. 그들은 부활 때에 결혼이나 부부의 인간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였다.

[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해 몇 가지 증거하셨다. 첫째로, 복된 부활은 합당한 자들만 누릴 것이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5:28-29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고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3:5).

둘째로, 부활한 자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하고 천국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자녀 출산이 필요치 않고, 부활한 몸은 육신의 정욕과 죄성도 없을 것이다.

셋째로, 부활한 자들은 다시 죽지 않는다. ‘천사와 동등하다는 말은 사람이 천사처럼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천사처럼 결혼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국에는 사망이 없고 질병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21:4).

[37-40]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예수께서는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증거하셨다. 그는 부활에 대해 직접 증거하는 구절(26:19; 12:2)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이것들보다 더 근원적인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에 대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3:6)고 하신 말씀이며, 그 속에 죽은 자의 부활의 진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 즉 죽은 인물을 기억하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은 다 죽었지만, 그 영들은 다 천국에 살아 있고 그 육체도 어느 날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의인들의 영광스런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부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 소망을 확실케 하셨다.

[41-4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이제 예수께서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심으로 그들에게 한 가지를 질문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과연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1:1).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 메시아께서 다윗의 주님, 즉 신적 구주이실 것도 예언했다. 메시아께서는 전능하신 왕, 영존하시는 아버지’(9:6), 그리고 다윗의 뿌리라고 불리신다.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다윗의 가지는 그의 인성(人性), ‘다윗의 뿌리는 그의 신성(神性)을 보인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승천하신 그는 사탄이 완전히 굴복될 때까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그의 영으로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원받은 성도는 두 영역에서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교회에 속하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와 감사 예물을 드리게 하셨다. 우리는 구약의 의식법은 신약 아래서 성취되었다고 보지만, 위축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신약 아래서 자원함으로 주일을 온종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키며 또 자원함으로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 이상과 감사의 헌금들을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는 또한 세상 나라에 속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법이 명하는 의무들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등을 포함한다. 성경은 나라에 세금을 내라고 가르친다(13:7).

둘째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사두개파적인 불신앙은 부활을 부정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성도의 복된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부활의 능력이 되신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확증이다. 악인들의 부활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이르는 부활이지만, 의인들의 부활은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영생할 복된 부활이다. 의인의 부활의 몸은 썩지 않는 몸, 아름다운 몸, 강한 몸, 죄성이 없고 시공을 초월하는 영적인 몸일 것이다(고전 15:42-44).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믿자. 한 분 예수님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자손이시며(1:1) 또한 다윗의 뿌리다윗의 주이시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그는 인성으로는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며(4:15), 신성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으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1:1),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딛 2:13)이시다. 신적 구주이신 그는 우리의 기쁨과 위로와 힘과 도움이시다.

45-47, 참된 경건/ 서기관들을 주의하라

[45-46]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조심하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는 선생을 따르며 배우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조심해야 할 서기관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선, 그는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는 자는 외모를 중시하는 자이다. 외모를 중시하는 자는 외식에 빠진 자이다. 우리는 외모를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치장하지 말고 평범한 복장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우리는 단정한 복장을 해야 한다(딤전 2:9). 오늘날과 같은 음란한 세대에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단정한 복장을 해야 한다. 특히 우리의 어린 딸들이나 여학생들이나 젊은 여성들은 너무 짧은 치마나 너무 파진 윗옷이나 너무 딱 달라붙는 바지는 피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합당치 않은 복장이라고 본다.

또 예수께서는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자는 명예욕이 있는 교만한 자이다. 명예는 좋은 것이지만,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오는 욕심이다. 모든 사람 속에는 명예심이 있고 교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죽이고 꺾어야 한다. 명예욕이 있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며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모르는 자이다.

[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오이키아스)[집들]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형벌]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또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는 물질적 욕심이 있고 불의하고 불법한 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에 그러하지만, 옛날에는 남편이 여자들의 경제적 안정이었다. 과부는 대체로 경제적 보장이 없는 자이었다. 그런데 그런 과부의 가산을 삼키다니 그는 인정도 사랑도 없는 자이다. 과부들은 그들 때문에 마음에 큰 고통을 당했고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었다. 참된 경건은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선한 마음으로 나타난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또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외식으로라는 원어(프로파세이)는 ‘보이려고라는 뜻이다. 성도가 진심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예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약 3시간이나 기도하셨다. 또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신 적도 있으시다. 그러나 진지한 내용이 없이 주문 외우듯이 무의미하게 말을 반복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 즉 외식적 기도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의 받는 형벌이 더 중하다고 부언하셨다. 외식자는 하나님께 더 큰 형벌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나 학력이나 재산 같은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지 말고 바른 지식과 사상,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 바른 인격성과 도덕성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외모로나 외적 조건은 그럴 듯해도 내면성, 인격성이 갖춰져 있지 않은 자는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

[욥기 28장 주석 성경말씀] 욥-지혜는 고귀하다(욥 28:1-28)

 

[욥기 28장 주석 성경말씀] 욥-지혜는 고귀하다(욥 28:1-28)

욥기 28장에서는 욥의 신앙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욥이 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얻은 지혜로는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bedesd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