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독교 교리 성경공부 중에서 칼빈주의 성경 관점이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관점은 중요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인본주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은 신본주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위주로 성경을 보게 되면 기적과 이적들이 모두 신화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신화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미련한 한계에 하나님을 가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 이상의 일들을 하시는 분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성경을 보는 관점이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 사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의 틀 안에 가두어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칼빈주의 성경 관점
1. 서 론
성경관은 신학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관점은 그의 사상과 믿음과 삶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경 이해의 주관주의에 치우치는 자유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는 올바른 성경관을 갖도록 함이 매우 중요하다.
2. 본 론
1) 객관적 계시(客觀的 啓示)로서의 성경
현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성경에 대한 근본적 태도는 동일한 부분이 많은데 그중의 하나는 성경에 대한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하는 것과 계시의 주관성(主觀性)만을 강조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단순히 책으로서의 성경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구별 짓는 요소는 인간의 반응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르트와 부룬너는 완성되어 이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강조하기를,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적으로 사람에게서 소원된 응답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계시의 말씀은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해졌으며 또한 여전히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지속적(continuos) 혹은 아마도 더욱 낫게는 반복적(frequentative)이라고 불릴 수 있다. 계시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결코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객체가 되지 않는다”. 고 하여 계시의 객관적 존재를 부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계시 자체와 계시의 증거를 구분 짓는다.
그러나 16세기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성경에서 영구적인 형태로 주어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칼빈주의 교회는 성경의 객관성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주관적 요소를 동시에 강조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의 제1절은 성경의 객관성을 그 성경의 “기록됨”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때에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후에는 진리를 더욱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이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가 더욱 공고히 서고 더욱더 위로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것들을 온전하게 기록하시기를 기뻐하시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기록을 가장 필요하게 만들었으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장 제5절에는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온전성에 대한 수납과 확신의 주관적인 면을 고백하고 있다.
“...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그 말씀으로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개혁 교회는 성경의 객관성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주관성을 동시에 주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성경의 객관성은 오늘날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신적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자유주의적 주관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탈 성경적 행태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객관성의 강조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방패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광란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비난하여 말하기를 “...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서,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라고 반문하며 성경의 객관적 계시를 떠나 주관주의의 환상에 빠져있는 자들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전래 2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사실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신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혼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 말씀을 외면하고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경향과, 또한 다른 편에 배타적인 강조점을 두면서 성령의 역사를 간과하는 지성(知性) 정통주의적인 합리주의 경향을 목도하면서 올바른 방향 설정에 대한 상황적 요청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자계시(自啓示)는 본질상 말씀 계시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계시에 속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계시에는 ‘말씀 계시’ 뿐 아니라 ‘사건 계시’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일반 계시나 특별 계시는 양자가 다 객관적 계시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전자와는 달리 후자에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선지자적 영감과 사도적인 영감이 포함된다는 사실에서 상이점이 발견된다. 특별 계시가 종결된 이후,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곧 객관적인 특별 계시요, 성경 외에 더 이상 다른 특별 계시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계시에 대해 헤르만 바빙크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수납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나타난) 객관적 계시로서는 충분치 않다. 거기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동반해야만 한다.”라고 하여 객관적 계시 외에 성령의 조명, 또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주관적 계시(主觀的 啓示)’라 칭했으나, 그가 말한 의도는 객관적 특별 계시의 내용의 불 충족성(不充足性)을 말함이 아니다.
바빙크는 그의 책 ‘신학의 방법과 원리’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 지어, 천국을 땅 위에 세우며, 세상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속하고, 이 모든 것 가운데,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더욱이,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객관적인 특별 계시가 주어져도, 타락한 인간이 이러한 계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로써 아들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계속 있어야만 한다. 학문을 연구할 객관적인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정죄하고, 판단하는 주관이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종교에 주관적 종교가 서로 응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객관적인 계시는 그것을 받는 주체 안에 “내면적 계시”를 요청한다. 오늘날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내면적 계시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바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것이 객관적 계시와 연관을 가질 때에만, 바로 정립된다. 이로부터 벗어나가든지, 혹은 그것 위로 넘어서서 스스로 높은 체하게 되면, 주관적인 계시는 그 표준을 상실하게 되고, 이로써 각양의 미혹과 미신에 이르는 문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주관적 계시에 관한 해석은 오직 객관적인 계시에 의하여 바로 잡아져야 한다. 객관적 계시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다 계시되었으므로, 어떠한 부분만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아니했다. 만약 객관적 계시가 다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신인(神人)의 합일(合一)에 관한 의식(意識)을 밝히고, 이것을 강화하는데 그친다든지, 혹은 다만 경건한 감정을 되살아나게 한다든가, 혹은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의식을 높여, 천국 건설에 함께 참여케 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성령을 통한 내면적 조명의 필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특별한 은혜”(gratia specialis)로 말미암아 세상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특별히 구별된 성령의 사역,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주관적인 성령의 사역을 “넓은 의미에서” 계시(openbaring)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객관적 계시에 첨부한다는 의미에서 “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이 주관적 계시는 다만 신자로 하여금 객관적 계시를 알게 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도록 한다.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대하여, 인간은 성령의 주관적 계시의 역사에 의하여 종교적인 응답을 하며 하나님을 섬긴다.
이러한 바빙크의 견해는 비록 그의 용어가 혼란을 일으킬 요소도 없지 않으나 개혁파 전통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 하든 ‘주관적 계시’라 부르든 이 성령의 주관적 사역은 객관적 계시에 동반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개관적 계시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다는 의미의 ‘계시’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방편으로 죄인들을 그들의 존재(실유)와 의식에서 계속적으로 갱신(更新시키신다. 객관적 계시인 성경은 교회의 확장과 지도,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우는 일을 위한 성령의 중요한 도구이다. 이렇게 칼빈주의 성경관은 객관적 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 성령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된 성경
객관적 계시로서의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되었다. 영감(靈感)의 교리가 의미하는 바는 성경이 중대한 사실(事實)의 기록(記錄) 일뿐 아니라, 그 기록은 진리(眞理)이며 그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사고와 표현의 습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류로부터 보호되었으므로 그들의 소산인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무오(無誤)한 표준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靈感)에 대한 확신은 메이첸의 말과 같이 성경의 진실성과 진리성, 무오성, 권위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칼빈주의 교회의 전통은 신앙고백서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신앙고백의 처음엔 항상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영감과 그에 따른 권위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칼빈주의 성경관에서 핵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영감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 성경의 유기적 영감(靈感)
루이스 벌콥은 “유기적(有機的)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은 마치 기자가 펜을 사용하는 것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셨거나 그가 그들에게 쓰기를 원하신 말씀들을 그들의 귀에 속삭이지 않으셨으며 다만 그들 자신의 내면적 존재(실유)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작용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쓰이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또한 그들이 단어들을 선택하고 자신의 사상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지도하셨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견해에 대해 평가 하기를 “이 견해는 분명히 성경의 표현과 잘 조화가 된다. 그것은 성경의 기자들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미리 그들이 기록한 일들을 조사하였다(눅 1:1-4).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의 저자들은 반복하여 그들의 근거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멧시지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환경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또한 신약의 서신들도 우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시편 기자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경험들과 죄, 용서에 대해 (시 32: 과 51:), 둘러싸인 위험들과 은혜스러운 구출(시 48:과 116:)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시인들과 선지자들의 숭고한 시와 시적인 언어와 병행하여 우리는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산문을, 그리고 이사야의 순수한 히브리어와 병행하여 다니엘의 아람어적인 색채를 가진 히브리어를, 바울의 통용적(방언적)인 체제와 병행하여 요한의 단순한 언어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 그 자체는 그것이 기계적으로 영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성령은 기자들을 그들의 인격(personality)을 억압함이 없이 그 자신이 그들을 각기 임무를 위해 조성하신 대로 사용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셨고 지도하셨으며 그리하여 성경책들을 유기적으로 영감 하셨다”라고 하였다.
성경의 영감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영감을 주다”, 혹은 “영감”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표현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신적 기원을 나타내 주는 다른 표현 양식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입”, “성령의 학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표현 양식이 그것이다. 칼빈은 인간 기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너무 압도당해서 그들은 성령의 확실하고 성실한 서기로서 봉사하여 “성령이 부르는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칼빈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한 원리로써 받아들여야만 한다. 곧 율법과 예언서들은 인간의 쾌락을 위하여 전수된 것도 아니며, 그 근원이 인간의 정신에서 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하여 구술된 것이다.” 칼빈은 구술이란 용어를 그의 주석 전반에 걸쳐, 특히 예레미야와 바룩에 대한 토론에서 사용한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구술에 대해 언급할 때 ,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주시는 교리나 가르침이란 배경 하에서 이 “구술”이란 개념을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이 구술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칼빈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단어와 사고에 따라,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독특한 상황 안에서 신의 가르침, 혹은 복음의 메시지를 설명하였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계시로써 인간들에게 주어진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 기자들은 그들이 독자의 능력과 특별한 상황에 맞추어 전할 낱말을 선택하고 그들 자신의 생각을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었다. 신의 메시지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칼빈이 영감을 “구술”로써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워필드는 성경론의 해설로 유명하다. 그는 한 평생 성경의 완전 영감과 무오를 변증 했으며 당대에서 가장 잘 변호할 수 있었던 변증가였다.
그는 딤후 3:15-16을 해석하면서 15절에 ‘성경’이란 말이 한번 나오지만 이는 성경의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라 강조했다. 또 16절의 ‘하나님의 감동’을 풀이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의미하며, ‘모든 성경’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라 했다. 또 벧후 1:19-21 말씀 역시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리킨다고 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이란 본래 ‘운반’이라 뜻이란 뜻인데, 이는 마치 물건이 운반자로 말미암아 운반되어 목적지로 옮겨지듯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전연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끌려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적 영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은... 철두철미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책으로 인식되는데, 매 곳에서 하나님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고, 사람이라는 그들의 본성으로 왜곡시키지 않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을 통해 주어진, 매 곳에서 인간 저자의 시상을 나타내고 있는 그런 책으로 인식되었다”인간 저자들은 구애받지 않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임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위해 필요한 한도까지 계시하셨다. 그 결과로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를 정확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유기적 영감의 증거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 성령이 선지자와 사도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사로잡고, 인도하사 그들 자신이 생각하며, 말하며, 또한 기록케 하신다. 성령의 강한 역사로 감동되었지만, 말하는 이는 역시 그들 자신이다(벧후 1:20). 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에, “제일저자”의 이름으로 한 것이 많지만(눅 1:70, 행 1:16 등), 제2 저자, 예컨대, 모세, 다윗, 이사야의 이름으로 인용된 곳도 적지 않다(마 13:14,22:43, 요 1:23,46, 5:46,12:38 등).
둘째, 소위 성령에 의한 <기록에의 충동(衝動)>이 유기적 영감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직무가 반드시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고,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글을 썼다는 자체가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감동하심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셋째,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기록의 단계로 넘어갈 때,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을 보며, 계시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여유가 있었다. 시편에는 경건한 찬송이 담겼지만 탄식과 기쁨과 간구와 감사가 뒤섞여 있다. 저자들의 소망과 두려움, 믿음과 신뢰, 비참과 탄식이 그려져 있다.
넷째,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다 각각 특색이 있고, 서로 다르다는 점이 유기적 영감을 지지한다.
요컨대, 성경 기자들의 교양과 지식, 정서와 경험 등, 그들의 인격 전체가 유기적으로 사용되면서도, 성령이 제일저자가 되어, 그들을 감동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되었다.
나) 완전 축자 영감(完全 逐子 靈感)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의 성경의 영감은 “완전 축자 영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완전 축자 영감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유기적 영감설은 축자 영감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할 때의 성령의 사역은 미리 양육한 성경 저자들의 의식 속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뜻이 모든 계금의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게 좋은 방법으로 알려지도록, 저자들의 사상과 문체와 단어 선택까지 주관하셨다. 사상 속에 문장이, 문장 속에 단어가, 단어 속에 자음과 모음이 서로 얽혔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고집하여, 서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경의 각 단어나, 일점일획이 개별적으로 무한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한 문장 속의 적당한 위치에서 그 깊은 의미를 발휘한다. 성경을 원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개체와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잊으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유대 서기관들처럼 우매한 성경해석을 낳기 쉽고, 성경을 존대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게 욕을 돌린다.
요컨대, 성경은 유기적으로 영감 되었다. 이것은 물론 축자영감을 배제하지 않는다. 축자를 고집하는 나머지, 그 문장 전체나 사상을 무시하거나, 사상을 고집하는 나머지, 문자나 단어를 무시함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단어나 사상뿐만 아니라, 저자의 경험, 재능, 인격 전체를 성령이 주관하사,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표현되도록 감동하셨다.
또한, 워필드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영감 된 인간 저자들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인간의 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관계를 성당의 색유리창을 통과하는 빛의 비유로 설명함으로써 인간 저자들의 오류가 불가피하게 성경 속에 들어 있다는 자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성당 창문의 색유리를 통과하는 빛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지만 그것이 통과하는 유리의 색조에 물들여지는 것처럼, 인간의 심혼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그것이 주어지는 통로인 인간의 개성에 채색되어 나오는 것이 분명하며 바로 그 정도만큼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건축가에 의해 색유리창의 색깔이 성당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빛에 본래의 색조와 색질을 정확하게 주기 위한 분명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면 어쩌겠는가?” 워필드는 이렇게 색유리 비유를 통한 성경유오(聖經有誤) 주장을 배격한 후,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동류적'(concursive, confluent) 작용이 오류를 절대 불용(不容)하며 오히려 “그 작품에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신적 성질을 제공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성경의 영감이 성경 전체와 단어 선택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성경은 무오(無誤)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동류적 작용을 통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때, 워필드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원본을 두고 한 것이다. 워필드는 정확 무오성은 성경이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 원본(原本)의 정확 무오성(正確 無誤性)은 또한 성령의 내증(內證)에 의해 신자의 마음속에 확인된다. 워필드는 성령의 내증이 없이는 “성경이 우리 앞에 무기력하게 놓여 있고 우리의 가슴과 머리에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그것이 있으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지식의 활력 있는 출처가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존 머레이는 1960년경 기독학생회(I.V.F)에서 행한 연설에서 “성경의 영감은 축자 영감이다. 만약 성경의 영감이 단어들의 영감을 수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코 영감일 수 없다. 단어들은 교통(交通)의 수단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13에서 확언하는 것은 축자 영감과 다름없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앞 구절들이 보여 주고 있듯이, 바울은 성령에 의해 가르치신 진리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어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선 문법적이고 구문론적인 관계 속에 있는 단어들, 다음으로 더 넓은 문맥(文脈)과의 관계 속에 있는 단어들, 마지막으로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계시의 내용과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단어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성경의 견지에서 해석되어, 성경이 결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다. 그것들은 성령에 의해서 의도되었다는 의미에서 성령에 의해 영감 된 단어들이다. 이것은 성경의 의미와 내용은 성경이며, 우리가 임의로 성경에 부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하여 성경 영감의 축자성을 증거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축자 영감은 성경이 완전 축자 영감 되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성경의 무오성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3) 최종 유일의 권위인 성경
성경의 완전 축자 영감에 대한 고백은 당연히 그 성경의 권위에 대한 고백으로 인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8절-10절은 성경의 권위를 성경의 영감성에 두어 고백하고 있다.
“(옛날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국어였던)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신약이 기록될 때에 많은 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졌던) 희랍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직접 받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살피심과 섭리에 의해서 만대에 순수성이 보존될 권위가 있으므로 교회는 모든 논쟁에서 궁극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를 해야 된다.. 정확 무오한 성경의 법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신앙에 관한 모든 분쟁들은 최고의 심판자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야 하고 제반 회의의 모든 신조, 고대 신학자들의 의견들, 사람들의 학설과 개인의 영혼들도 그 심판자에 의해서 주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판결에는 전적으로 복종을 해야 되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어느 누구도 최고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여 성경의 유일 최종의 권위를 고백한다. 따라서 성경의 영감은 성경 권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존 머레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들은 분명히 한편으로는 전통과 교회의 의견을 전거로 삼는 로마 가톨릭,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적인 내적 조명을 통한 특별 계시에 대한 광신적인 주장을 겨냥한 것이다... 이 표현에서 한 구절이 종종 오해되고 잘못 적용되고 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우리 마음에 말씀에 의해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성경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살아 있고 영속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개혁자들은 살아 있는 음성이 교회의 신앙과 지도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상쇄하기 위해, 또한 신자의 내부에서의 성령의 음성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동일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이러한 성령의 특질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10절에서는 상호 연관된 특질인 성경의 궁극성이 고찰되고 있는데, 총회의 성직자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 신조화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수많은 신학적 저작들,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하는 저작들을 읽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 저작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 자체로 설명해 나가려 한다든가 성경 자체로 자신의 사고를 규제하려고 한다든가 하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교개혁, 특히 대표적 개혁자들의 규제 원리가 포기되었으며, 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성경의 궁극성도 포기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현대의 탈 성경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존 머레이는 계속하여 ‘성경의 유일 무이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모든 교리,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는 구속의 모든 빛, 시간과 영원의 문제들에 대한 소망의 모든 빛에 있어서 성경의 메시지에 의존한다. 성경 없는 현재의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아니며, 성경에 하나님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될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는 기독교이고, 주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와 구원의 관계를 갖는 것은 길 잃은 자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한 유일 무이성(維一 無二性)은 손상되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지위, 그리스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성경의 관계 때문에 성경은 유일무이하다. 성경은 우리가 은혜의 구속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구속주로서의 유일무이 성을 갖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식, 믿음, 체험, 소망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성경은 유일무이하다. 우리는 구원하고 구속하는 은혜에 관한 한, 성경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의지의 유일한 계시다. 이것이 성경의 유일무이 성이다"라고 하였다.
헤르만 바빙크도 성경의 권위에 대해 “성경의 권위는 모든 다른 권위를 훨씬 초월하여, 하늘 같이 높기 때문에,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해야 한다. 성경이 권위는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법황이나, 세상 정권이나, 총칼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신적 방법 곧 성령의 역사로써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식과 확신은 오직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실 때뿐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도날드 맥킴은 그의 논문 “칼빈의 성경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나 추측 이상에 있는 것, 즉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 의해 이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성경에 대한 존경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이 말할 때 인간적인 수단들을 결코 의존하여 증거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이 신에 관하여 말한 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성령의 증거가 모든 이성보다 우월하며,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써 증명되기 전에는 그 말씀은 인간의 마음에 결코 수용되지 못할 것”임을 칼빈은 말했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영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신실하게 선포해야 함을 칼빈은 믿었다(기강1.7.4).
성경의 자기 확증적 권위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강조는 ”성경의 권위를 증거나 논리에다 굴복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칼빈으로 하여금 생각나게 했다. 칼빈이 기록하길 “성경 안에서 유일하고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 각자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다”(기강1.7.5).
따라서, 칼빈이 가장 강하게 강조한 바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는 성령의 사역에 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증거 하여 주는 인간적 증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이 독특한 장엄성, 강한 인상, 최고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기강1.8.1-4). 기억들과 예언(제5-10부); 단순성, 천상적 성격, 그리고 신약의 권위(제 11부); 교회의 우주적 일치성, 순교자들의 믿음(제 12-13부), 그러나 칼빈에게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헛된)한 것이었다. 이런 외적인 주장들이나 “인간의 증거들”은 적합하지 않다고 칼빈은 말했다. 단지 이런 것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간접적인 도움으로써” 유용하다(기강1.8.13).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이미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이러한 증거들은 유용하다. 외적인 증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확실해지고, 성령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도록 한 후에야 비로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끔 더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로써는 결코 믿음을 세울 수 없다. 칼빈이 말했듯이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설득 위에 기초할 때에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을 충분히 보여줄 것이다”(기강1.8.13).
따라서 칼빈주의 성경관은 성령의 사역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최종적이며 유일한 권위는 성경의 영감과 그것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칼빈주의 성경관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 자체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3. 결 론
칼빈주의 성경관은 성경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수집물이나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기록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고등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기록된 객관적 계시로서 스스로의 권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개관적 계시인 성경이 개인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의 조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성경관은 성경에 대한 확신과 이해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감동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초자연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에 대한 파괴적 비평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성령의 조명과 성령의 확신케 하시는 초자연적 경험을 갖지 못한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관은 신학과 설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극히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관의 정립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비평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의 발현으로 성경에 대한 개념이 저급한 단계로 내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칼빈주의 성경관의 확립과 교육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말씀의 권위 아래 교회의 일과 우리 모두의 삶을 순복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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