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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장 설교말씀] 청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전 12:1-4)

성령의 능력 2021. 5. 10.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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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전도서 12장 설교말씀 중에서 청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젊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아무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알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부터 청년의 힘이 있는 그때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청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전 12:1-4)

 

전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전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본문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라는 교훈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기억하라는 말을 단순히 머릿속에 생각만 하라는 식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 기억하라는 말은 행동을 요합니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붙들고 "얘야,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주님을 섬겨. 기억하라"라고 유언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유언을 머릿속에 그냥 기억해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행동과 삶을 바꾸라는 우리 부모의 간절한 충고입니다. 내 삶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삶의 도전입니다. 단순히 머리 속에 기억해 두라는 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젊었을 때 창조자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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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젊어야 건강의 힘도 있고, 기억력도 있고, 활동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젊을 때는 인생의 기초를 닦을 때입니다. 학문도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건물도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곧 신앙의 기초가 확실해야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 신앙의 기초를 잘 닦아 두어야 큰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50이나 60이 가까워져서 회개하고 예수 믿고 큰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목회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갑자기 은혜를 받고 신학자가 되고 목회자가 된 사람 중에 큰 일꾼이 많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 그것이 부모의 영향이든지 스승의 영향이든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던 사람들이 큰 신앙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유아 교육과, 아동 교육, 그리고 중 고등부 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2. 젊음이 항상 계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계절은 반복해서 다시 옵니다만 인생은 한번 지나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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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밤은 한낮의 일과가 끝나고 쉬는 때입니다. 활동이 중단되고 정지되는 시간이며 하루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역사에도 밤이 있고 개인에게도 밤이 있습니다. 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일어난다는 것은 비가 오고 걷히고 다시 구름이 끼고 다시 비가 오는 기상의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가 오다 날이 개고 다시 구름이 끼었다가 비가 오는 그 사이사이 햇빛이 비췰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기회란 햇빛이 났다가 비가 오고 구름이 걷히고 다시 햇빛이 나는 것과 같이 찰나 찰나에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어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곤고함은 계속됩니다. 신경통이 사라지니까? 두통이 옵니다. 두통이 사라지면 치통이 오고 치통이 사라지면 요통이 옵니다. 비 뒤에 계속 구름이 낍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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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이 말씀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는 말씀은 우리의 육체를 집에 비유한 것입니다. 손발이 점차 덜덜덜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는 표현처럼 어느덧 나의 육체는 구부러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치아를 맷돌질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씹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진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 육체의 창인 눈을 말합니다. 창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것처럼 우리의 눈은 어느새 희미해져 갑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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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길거리의 문들이 닫혀질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듣는 귀를 말합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식욕을 의미합니다. 청년의 때 우리는 음식을 앞에 두고 신나게 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늙어져 가면서 노인들의 식욕은 떨어지게 되고 무엇을 먹을 때 그냥 우물우물하다가는 삼켜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요.라는 말씀은 젊었을 때는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노인들을 보면 잠이 없어 새의 소리만 듣고도 일어나게 됩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노인들입니다.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라는 말씀은 음악 하는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목청을 말합니다. 노인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집니다.

 

이렇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너희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섬기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고통이나 죽음에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인간은 어느 때인가는 위에서 말한 과정을 밟도록 되어 있습니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19:10).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삶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점에서 존엄한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실현되어야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다른 어떤 요구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기본적 필요'(human basic needs)는 능력의 유무, 노력의 유무, 신분, 성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책의 우선순위 중에서 도시빈민, 장애자, 고아와 양로원의 노인들의 복지 개선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빈곤을 해소하는 이 과업은 개개인의 자선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분배제도 개혁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

 

공리주의는 경제의 목표를 필요충족에 두지 않고 쾌락 극대화에 둡니. 부를 인간 완성의 물질적 조건으로 보지 않고 행복의 원천으로 봅니다. 성경은 결코 부를 행복의 원천으로 보지 않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과의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질은 인간의 자기실현, 하나님의 형상의 실현의 한 조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나친 불평등은 욕망과 필요를 더욱 괴리시킵니다. 따라서 욕망이 아니라 필요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려면 심한 불평등을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IV. 상대적 평등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평등으로부터 시발된 평등주의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법 앞의 평등, 정치적 평등으로 확대되어 오다가 마침내 사회경제 평등까지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평등의 유형도 완전평등, 기본적 필요충족의 평등, 상대적 평등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완전평등을 정당화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완전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재분배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또 자원배분의 비효율과 인센티브의 결여로 말미암아 생산 총량이 감소할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른 자와 부지런한 자를 평등하게 대우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성경은 왜 불평등을 배제하고자 하는가?

첫째, 불평등은 불가피하게 광범위한 대중들의 빈곤을 초래한다.

빈곤은 성경이 경제문제 중 가장 중시하는 문제이다. 둘째, 불평등은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압제와 수탈을 가능케 한다. 재산이 전혀 없는 사람은 노예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리고 물질주의, 이기, 탐욕을 조장하고 또한 비굴, 시기심을 유발하여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거듭 가진 자들의 압제와 수탈을 고발하였던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 셋째, 부자들의 부는 공유물인 자연의 독점, 착취에 의한 것이 많으므로 정당성이 없는 부문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그래서 성경에 지나친 불평등을 막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최초의 토지의 평등분배(14:2), 안식년과 희년 제도(레 25:10) 등은 생산수단의 주기적, 평등 재분배를 통해서 비교적 평등한 경제상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개인의 노력에 따른 차등은 인정한다. 개인의 도덕적 자유를 인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서도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V. 결론

 

성경이 제시하는 경제적 정의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 우선적으로 가난을 해소하는 작업, 즉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가 충족될 것이 요청된다. (2) 사유재산권의 보호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되 그 재산권은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조건부 권리이. 하나님과 공동체의 필요에 부응해야 되는 권리이다. (3) 불평등은 노력의 차이 등을 반영하는 선에서 최소화되어야 한다. 지나친 불평등은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위의 성경적 지도 원리는 한국의 현실 문제의 해결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갈등을 해소하고 올바른 인간관에 입각한 경제정의를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 그런 점에서 성경적 정의관에 대한 더 깊은 천착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젊을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받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1장 설교말씀] "일곱째 나팔소리와 천상예배”(계 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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