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마태복음 23장 예수님의 말씀] 위선자들을 책망하심(마 23:1-39)

성령의 능력 2022. 1. 1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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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들을 의식하여 보여주는 신앙을 했습니다. 우리는 보여주기 식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구원받은 척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위선자들을 책망하심(마 23:1-39)

 

[1-3]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는 선지자의 자리이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었다(34:10).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선포하고 전달하는 자이다.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비록 성경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자의 경건은 죽은 경건이다. 디도서 1:16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를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위선자의 말은 들을지언정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 . . .

예수께서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만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법들을 자세하게 규례화 하는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을 느끼며 구주께서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생명을 잃어버릴 때 규칙과 규례만 무성해질 것이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종교적 의무들을 부과해 놓고는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선이요 죽은 경건이다. 그러나 참 종교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하였다(딤전 4:12). 또 그는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명하였다(딛 2:6-7).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참된 경건은 모범된 행위로 나타난다.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 . . .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6: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구절들이 쓰인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6:5; 4:23; 딤후 3:5).

[6-7]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 . . .

예수께서는 그들이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은 명예심이요 교만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 . . .

주께서는 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Byz syrc )에는 8절에 너희 선생은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되어 있다. 랍비, 아비, 및 지도자라는 명칭은 다 종교적 지도자를 가리켰다고 본다. 우리들의 선생님과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했다. 영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칭호로 불리는 것은 합당치 않고 또 우리가 이런 칭호를 사랑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 형제자매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칭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들이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나 유익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유익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물론, 서로 존경하고 피차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며, 주께서 세우신 교회 직분자들을 존경하고 복종하는 것도 그러하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 . . .

주께서는 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천국과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20:28).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본받는 자로서 직분이 중하면 중할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어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겸손과 섬김은 영적 성숙의 표가 될 것이다.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예수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가 아니고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노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8()과 대조적으로, 본장은 위선적 지도자들에 대한 8()를 증거하였다(전통본문의 14절을 포함하여).

외식자의 한 특징은 천국 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천국은 인생의 최대의 목표와 소망이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딛 1:2). 예수 그리스도는 이 천국의 문이시다. 그는 양의 문,’ ‘구원의 문이시며(10:8-9)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14:6). 그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사역, 말씀사역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신 열쇠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와 예수님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 문을 여는 것이지만,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천국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그들은 천국의 안내자가 아니고 천국의 방해자 곧 천국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전통본문에는 14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외식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교묘하게 취하였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천국과 내세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고 땅의 것만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함으로 경건한 겉모양을 가졌지만,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였다.

이런 외식자들은 장차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께서는 권능을 많이 베푸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이 회개치 않음으로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 도시나 심지어 옛날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성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1:20-24). 죄에 경중(輕重)이 있듯이, 심판에도 경중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대로, 즉 그의 행위의 죄의 경중대로 합당한 벌을 주신다. 위선의 악은 큰 악이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 . . .

주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외식자들도 교인수를 늘이는 데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들었는가이다. 참된 회개와 구원이 없다면,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을 모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이다. 참된 신자들의 수의 증가가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외식자들은 쭉정이 운동을 하였고 얻은 교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부패하고 외식하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었다.

[16-22]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외식자들은 영적 소경이었다.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무엇이 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바른 판단이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 제단에 바쳐진 헌금과 예물을 더 중시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물질적 탐심을 헌금이라는 종교적 형식에 감추었다.

성전과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다. 그것으로 맹세함은 곧 그것이 상징하는 하나님으로 맹세함이 된다. 그것은 비록 가난하여 헌금이 없이 행해진 것일지라도 참된 맹세이다. 헌금과 예물은 물론 경건의 표현이다(고후 8:7-8). 그러나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성전과 제단이다. 그러므로 더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시해서는 안 된다.

[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땅의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27:30). 그러나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의와 인()과 신()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에 일치하게 행함을 의미한다. ()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선지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6:8).

저 소경된 지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었다. 주께서는 십일조 생활을 하루살이에 비교하셨고, 의와 인과 신을 약대에 비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생활의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여야 하고, 실질이 없는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을 알아야 한다.

[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부정 不正](전통본문)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저 외식적 지도자들은 외적 성결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탐욕과 부정(不正)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마음의 성결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결이다. 마음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위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내면적 성결이 없는 외적 성결은 가치가 작고 위선에 그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3-7에서 말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내면적 성결이 없는 외적 단장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불쾌한 냄새로 가득하다. 이와 같이 외식자들은 의롭고 선한 자처럼 보여도 실상 마음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 우리는 먼저 내면적 성결과 단장, 즉 지어낸 의와 선이 아닌, 진실한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한 의와 선은 장려되지만, 모든 위선과 외식은 단호히 정죄된다. 베드로전서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29-3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므네메이온)[혹은 무덤]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저 외식자들은 선지자들을 위하는 자들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다를 바가 없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위선적 말이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하신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3:712:34에서는 독사의 자식들로 번역되었다. 외식자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마귀의 자식들이다.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듯이, 저 외식자들은 사람들에게 치명적 해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34-3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주께서 선지자들과 지혜자들과 율법교사들을 그들에게 보낼 때 그들은 그들을 죽이고 채찍질하고 핍박할 것이다. 주의 종들은 유대인들에게 죽임과 채찍질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기억하고 담대한 마음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의인 아벨로부터 역사상 흘려진 의로운 자들의 피흘림의 절정이 될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조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 핏값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으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 성이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는 황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 회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나타날 것이다. 역사는 이 세상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영광스러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1-2에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며 또 아름답게 단장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증거하였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인류의 복된 최종적 상태, 곧 천국의 소망이다.

[시편 8편 히브리어 성경 주석강해]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다운지요(시 8:1-9)

 

[시편 8편 히브리어 성경 주석강해]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다운지요(시 8:1-9)

시편 8편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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