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마가복음 12장 예수님 말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막 12:1-44)

성령의 능력 2021. 11. 1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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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에서 악한 포도원 농부들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종을 잡아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다른 종을 보냈더니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습니다. 다른 종들을 또 보냈더니 때리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농부들이 이는 상속자라고 하면서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던져버렸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막 12:1-44)

 

1-12, 악한 포도원 농부들

[1-5]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에게 돌을 던지며](전통본문)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산울은 생(生)나무 울타리를 가리키고, ‘즙 짜는 구유 자리는 포도즙을 짜는 큰 통을 둘 자리를 가리킨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농부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비유하였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었다. ‘포도원 소출은 성도들의 선행의 열매를,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한 삶을 요구하셨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서 선한 행위 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종을 영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그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며 죽이기까지 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악한 자들이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보다 더 악해지는 것 같다. 타락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참된 종들을 핍박한다.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선지자들과 다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충분하게 증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우신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이 충족하게 기록되었다.

[7-9]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 농부들은 참으로 악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 유대인들의 행위는 인간의 무지와 배은망덕의 극치이며 종교적 부패, 교회의 부패의 극치일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죽인 죄에 대한 대가를 크게 받을 것이다. 또 구약 교회는 이제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신약교회이다.

[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구약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주와 교회의 기초가 되셨다(고전 3:11).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가장 극악한 행위를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생명을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보화를 보화로 알지 못하는 저 무지한 죄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며 그가 세상을 위해 가장 복된 선물로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어야 할 그들이 도리어 그를 잡아 죽이려 하니 참으로 불쌍한 자들일뿐인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시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를 영접하고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열매를 원하신다. 그것은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바르고 선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셋째로, 창조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고 마지막 심판 날에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13-17, 그리스도인과 세금

[13-16]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중에서 사람들을 보내었다. 예수의 교훈은 악한 위선자들에게 눈의 가시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미워했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는 경건함을 추구하였고 정치이념에 있어서는 반(反)로마적이었으나 헤롯당원들은 로마 황제가 세운 헤롯 왕을 지지하며 친(親)로마적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 와서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참되시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저 악한 자들은 예수님께 이 말을 진실한 고백으로가 아니고 그를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외식함을 아셨다. 만일 그가 옳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그를 친(親)로마파로 몰아 반로마적 정서를 가진 대중들과 대립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일 그가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그를 반(反)로마파로 몰아 로마법을 어기고 황제를 대적하는 자로 고발하려 할 것이다.

사람이 궁지에서 범죄치 않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만 살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 앞의 이익이나 세상적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전진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고 승리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그러하셨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게 하신 후 이 화상(畵像)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에는 주로 세 종류의 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첫째는 유대인의 동전이고 둘째는 헬라인의 은전이고 셋째는 로마인의 은전이었다. ‘렙돈이라는 유대인의 동전은 가장 가치가 작았다. ‘드라크마라는 헬라인의 은전은 데나리온이라는 로마인의 은전과 값이 비슷하였다. 한 드라크마 혹은 한 데나리온은 약 128렙돈이었다(NBD). 또 당시의 데나리온 은전에는 디베료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은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의 통치 아래 있음을 의미하였다. 가이사의 통치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신 현실이었다.

[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돈을 사용하고 있듯이 로마 나라에 대한 세금의 의무도 합당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도가 세속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도 보여준다.

첫째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세속국가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이사의 영역이 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국가가 교회를 압제하고 핍박해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려 해서도 안 된다. 중세의 교황들이 세속국가의 황제들을 힘으로 지배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요한복음 19:36에서,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세상의 악들에 대해 책망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만, 세속적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진술하였다: “[교회의]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31:5).

둘째로, 성도는 자신이 속한 세속국가의 일들에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국가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 법에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정한 세금도 성실하게 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국가의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사자혹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고 규정된 세금도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13:1, 4, 6, 7). 사도 베드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교훈했다(벧전 3:13).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23:2), 우리는 심지어 합법적 전쟁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24:1)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려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과 감사헌금을 즐거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세속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자.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지 않는 한 순종하고 세금도 충실히 내야 한다. 우리는 또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다하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해야 한다.

18-27, 부활을 증거하심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부활이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을 정신적 부활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부활은 죽은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다. 유대인 공회 회원들의 한 부분은 바리새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분은 사두개인들이었다(23:6).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을 믿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유주의자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앙자이며 적그리스도 정신을 가진 이단들이다.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호칭보다 낮은 존칭어이었다. 그들은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고 불리는 구약의 법을 인용했다(25:5-6). 그것은,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첫아들은 형의 자손이 되게 하는 규정이었다. 이것은 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법이었다. 우리는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의 아들들, 엘과 오난과 셀라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그 예를 본다. 수혼법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보존을 위한 규정이었다. 이스라엘 지파들의 보존은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필요하였을 것이다.

[20-23]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일곱 형제의 이야기가 실제적 사건이었는지 가상적 이야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기발한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의 생각을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인간의 최선의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질문에 불과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었다. 인간의 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진리에 일치하며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는 바이다.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의 침입자와 같았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씻음이 있으면 부활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죄사함을 믿는다면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한다.

또 인간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거기에 인간 존재의 가치가 있고 또 두려운 점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부활체의 인간 존재를 예상케 한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극악한 악인이 자살함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 세상에서 공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공의가 확립되려면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는 부활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실 수 있는 자이시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는 부활의 능력이 있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오해하였다.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부활한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것은 사람이 천사들과 같이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며 이것이 사람의 사람다운 특징이다. ‘천사와 같다는 말은 단지 내세에서는 자녀 증식이 필요 없고 육신적 정욕도 없기 때문에 천사들과 같이 결혼의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다. 천사들은 영이기 때문에 결혼이 없다. 이와 같이,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다.

[26-2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모세의 책이라는 말은 주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이 하나님의 종 모세가 쓴 책임을 증거하신 것이며, 더욱이 이라는 단수명사를 쓰신 것은 그 다섯 권의 책들이 한 권의 책으로 간주됨을 증거하신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주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과 신적 권위성을 밝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의심하게 하는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비롯하여 성경의 권위를 확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증거로서 단순히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얼른 보기에 부활과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용된 이 말씀의 참뜻은 예수께서 설명하신 바와 같이 인간의 부활을 내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결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기억 속에만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족장들의 불멸적 영혼들은 지금도 살아 있고 장차 부활하여 복된 인간 존재들로 나타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뜻하신 바이다.

본문은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첫째로,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의 어느 내용은 믿고 어느 내용은 믿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는 자들이 되자. 오늘날에는 성경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만연하다. 이것은 확실히 마귀의 미혹이다.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하는 사두개파적 불신앙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계시들과 기적들을 다 믿고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들과 기적들을 많이 증거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 믿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죽은 자들의 복된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근본적인 뜻이다. 복된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뜻이다.

28-34, 첫째 계명

[28-31]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영혼]을 다하고 뜻[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것이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전통사본)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중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6:5에는 목숨과 뜻 대신에 영혼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네페쉬)영혼목숨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다. ‘이라고 번역한 말(디아노이아)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 즉 목숨과 생각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분이시다. 그는 그의 창조물인 인간들로부터 최상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남편과 아내보다 자녀들보다 형제들보다 더 존귀하시다. 그는 재물보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보다 더 가치 있으시다. 세상의 것들은 다 낡고 없어지지만 그는 영원하시다. 그는 참으로 모든 피조물에게서 최상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는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둘째로 중요한 계명은 인간관계의 계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제9계명까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과 같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남을 죽이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 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내지 않을 것이다.

[32-34]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이나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계명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지키지 못한 죄악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제도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 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계명들을 지켜 바르고 선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어떤 외적 종교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칭찬하셨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사람의 생활 기준을 보이며 또 사람이 그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을 알고 그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 우리는 그 첫 번째 계명을 못 지킨 큰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자.

35-37, 다윗의 주, 예수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가르치심은 그가 하신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의 사역이었다. 그는 참 선지자이셨다. ‘성전에서가르치셨다는 말은 성전 뜰에서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는 산에서도(5:1), 바닷가에서도(13:1), 다락방에서도(14:15; 14-16), 또 성전 뜰에서도 가르치셨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이것은 다윗에게 암시된 바이었고(삼하 7:12-17) 여러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바이었다(11:1; 23:5-6; 34:23).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한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여러 곳에서 예언하였다. 메시아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었고(9:6) 그의 근본이 태초로부터라고 예언되었다(5:2). 그러나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한 면만 알고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일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36-37]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네 발등상(발판)이 되게 하기까지](전통본문)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거룩한 저자들이 쓴 책들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쓴 시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는 성경의 영감을 증거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지 못하지만, 성경책을 통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며 오늘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도구가 되는 책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 시편 110:1, 메시아께서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또한 다윗의 주라고 말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구약 원문에서 주께서라는 말(예호와)는 ‘여호와께서이며, ‘내 주께라는 말(라도니)은 본문과 같이 내 주께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나의 주’(아도니)라고 부른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먼 자손인 메시아를 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 때문이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며 또한 다윗의 주이시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는 그의 신성(神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영광의 주’시며(고전 2:8; 2:1), ‘하나님’(1:1),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했다(고후 4:3-6).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그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의 사역과 통치권을 보인다. 그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지만, 하늘로 올리우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마침내 원수를 발 아래 밟게 될 것이다. ‘네 원수는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과 인류의 싸움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싸움이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뱀 곧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 그 싸움의 승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을 때 법적으로 성취되었고, 그가 재림하실 때 실제로 사탄을 멸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예수께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고, 백성들은 그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신성(神性)의 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참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인간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황공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크시고 놀라우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20:28). 우리는 예수님의 신인 양성을 깨달음으로써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다윗의 주 곧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왕 곧 우리의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배우기를 힘쓰며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7:46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주와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자.

38-40, 악한 지도자들

[38-39]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몇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했다. 즉 그들은 외적 치장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내면적 단장, 곧 인격과 도덕성의 단장을 힘써야 한다(딤전 2:9-10).

둘째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이나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세상적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랍비나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교훈하셨고 또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23:8-12).

우리는 이런 교만한 외식자들을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레포 아포)떨어져서 본다, 주의한다, 피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말고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종들과는 가까이하고 존경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이런 외식자들은 주의하고 피해야 한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고 멀리하라고 교훈한다(요삼 9-12).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셋째로, 서기관들은 과부의 집과 재산을 삼켰다.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에 불타 없어질 물질에 있었다. 그들은 외로운 과부들을 위하는 선한 자들이 아니고 단지 그 과부들의 집과 재산을 취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회가 되면 그 과부들의 재산을 삼켰다. 그들은 악하고 나쁜 탐욕자들이었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돈에 대해 깨끗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돈을 사랑치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3 전통사본). 불타 없어질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는 땅과 함께 망할 것이지만, 영원히 있을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이다.

넷째로, 서기관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였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이었다. 우리는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헛된 일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교훈하실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다(6:5). 하나님께서는 골방기도에 잘 응답하신다.

서기관들의 특징들은 요약하자면 외식과 명예심과 탐욕이다. 그들은 외식적 복장, 외식적 기도를 하였고 명예심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높임과 존경과 대우를 받기를 좋아하였다. 또 그들은 땅의 물질을 탐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특징들은 다 헛되고 악한 것들이다.

주께서는 이런 서기관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와 벌에는 경중(輕重)이 있다. 죄에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벌에도 큰 벌이 있고 작은 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그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들과 가까이하지 말고 좀 거리를 두고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살피고 조심하고 피해야 한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그들과 교제하고 또 그들의 조언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그들의 외식과 명예심과 탐욕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보다 그의 인격성을 중시하고,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보다 하나님과 천국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41-44, 한 과부의 헌금

[41-42]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명하신 헌금은 십일조와 감사예물이다(레 27:30-33; 3:8-10).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는 이유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24:1).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19-20). 헌금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작은 표시이다.

헌금의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이었다. 신약시대에도 교회는 헌금을 가지고 말씀의 일꾼들과 교회의 특별한 봉사자들의 생활비의 전부 혹은 일부를 공급하고, 또 국내외 전도를 위해 전도자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그들의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원해야 한다. 또 헌금은 교회 안의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위해서도 쓰여야 한다.

여러 부자들은 많이 넣었으나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한 렙돈은 128분의 1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작은 가치의 돈이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 약 6만원으로 보면, 한 렙돈은 500원 정도이고,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는 1000원 정도이다. 가난한 과부는 지극히 작은 돈을 헌금했다.

세상에는 빈부의 차이가 있고 그것은 여러 요인들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가 더 심화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부자들의 너그러운 자발적 구제 행위가 요청된다. 성도는 열심히 돈을 벌되 사치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바울은 부자들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딤전 6:17-19).

[43-4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예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보다 많이 헌금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히 헌금 액수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으시다. 부자의 많은 헌금은 선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 액수의 크고 작음보다 헌금자의 마음에 관심을 두신다. 예수께서는 헌금자의 헌금 액수와 그의 경제 형편을 비교하여 평가하셨다. 그것은 헌금자의 마음에 대한 평가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다. 그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표시이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후 8:1, 4, 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헌금을 단지 금액의 크고 작음으로 평가하려는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생각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 사랑 없음을 고백하고 반성하며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본받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헌금의 생활을 반성해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주권자와 주인으로 참으로 인정하며 그를 이 세상의 지존자(至尊者)로 참으로 인정한다면, 또 우리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참으로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의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장 예수님 말씀] 세례 요한의 출생(눅 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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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은 세례 요한이 탄생하는 배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들었는데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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