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사야 35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빈들의 샘물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렇게 메마른 심령들에게 복음의 생수가 임하니 메마른 심령들이 기뻐하게 됩니다. 사막과 같은 심령에 백합화 같은 꽃이 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임재하시면 메말랐던 인생에 은혜의 강물이 넘치게 되어 기쁨과 즐거움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제 목: 빈들의 샘물 The Oasis in the wilderness
설 교 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사 35:1-10, 요 4:5-14
요 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사 35:6-7)
주제: 빈들 같은 곳에 샘물이 흘러 오아시스로 바뀌듯 예수님 안에서 변화받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하란(밧단아람)에서 20년 이민생활 후 돌아와서 임시로 정착할 때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당시 남자 노예 값이 은 30개 시절)로 사고 여기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던 곳입니다(창 33:18-20). 이곳에 우물을 파고 온 가족이 생활했던 곳입니다. 요셉이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곳 이름이 샬렘(Shalem)이라고 했는데, 이곳이 바로 ‘수가 성’입니다.
이때가 정오쯤 되었고 제자들은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에 주님께서는 우물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때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주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님께서 목이 말라 이 여인에게 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의 대답과 질문 속에 우리는 세 가지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며,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으로 나라(민족 공동체), 가정, 교회가 모두 회복되는 것을 요한복음 4장에서 읽게 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가 여인에게 회복되니 사마리아 마을이 새 소망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여인의 가정이 치유되었고, 무너져 있던 교회와 나라가 회복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첫째로, 이 여인은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 (요 4:9) 그리고는 요한은 멘트 하기를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역사적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남북 왕국의 아픔이었습니다. 남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이 수도였고, 북쪽은 열 지파의 대표였던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사마리아가 수도였기에, 남북의 미움과 분단의 아픔이 신약시대까지 치유되지 않은 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북왕국이 주전 722년 앗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할 때 앗수르 왕이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에 거주하게 함으로(왕하 17:24이하)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북왕국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혈하게 되었고 그들의 우상 문화에 오염되어 ‘성결’(holiness, purity)을 생명처럼 여기던 유대인으로 볼 때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멀리하고 이방인 취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때 신바벨론제국이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대 지파 땅을 사마리아 총독이 다스리게 하여, 지파 간의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귀환 후 제2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동참하기를 원했으나 강력히 거부함으로 사마리아인들은 왕따를 계속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며 여인은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남자와도 상종하지 않는데 더구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대인이고 사마리아인이고 이런 지파문제는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대답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구원>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구세주>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영생>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이에 여인은 사마리아 인들의 자존심인 ‘야곱의 우물’을 내세우며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2)
우물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인내를 가지고 판 우물이며, 야곱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곳인데, 디나가 세겜으로부터 추행을 당하고 나서, 오빠들이 보복으로 세겜 성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여 삼일 째 되던 날 시므온과 레위가 모든 남자들을 죽임으로 야곱의 가족이 떠나야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그후 야곱의 우물은 사마리아인의 자존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설교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이 말에 귀가 버쩍 뜬 여인은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께 요청합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5)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여인의 가정에 상처가 있음을 보시고 “네 남편을 불러오라” (4:16) 하십니다. 이 영생수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와 죄 사함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여인은 주저하면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회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은 비수같이 그 여인의 심장을 찔렀던 것입니다. 깜짝 놀랍니다. 자신의 과거를 다 아시는 이 분은 보통 유대인이 아니라 대언자[선지자] 임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로, 여인은 대언자이시니 평소 궁금했던 교회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
이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요 4:21-24)
이에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오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I that speak unto thee am he.“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증거합니다. 얼굴 표정과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아가페의 주님과 만남으로 모든 것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배가 회복이 되니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가 달라졌습니다. 갈릴리 성지순례에서 다음 복음송가를 부르게 됩니다.
1)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이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2)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주님은 여인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인아 넌 날 사랑하느냐 ?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또 “우물가의 여인처럼” 복음송가에서
1) 우물가에 여인처럼 날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게 와 생명수를 마셔라
(후)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2) 많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주안에 감추인 보내 세상의 것과 난 비길 수 없네.
3) 내 친구여 거기서 돌아오라 내 주의 넓은 품으로
우리 주님 너를 반겨 그 넓은 품에 안아 주시리.
사마리아 성에 사는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만나 변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나 변하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영혼의 오아시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동네는 목마른 황무지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들과 같은 이곳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흘러나오는 제단이 세워지기를 기다리시며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을 땅을 기경하라 (break up your fallow ground).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for it is time to seek the LORD till he come and rain righteousness upon you)” (호 10:12)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보면 유대인 교육법인 ‘하브루타 Chavrata’의 원조 모습입니다.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학습방법으로 뜻은 ‘우정, 동반자 관계, 동료’를 뜻하는 아람어입니다. 랍비를 양성하는 예시바(Yeshiva) 학교와 초중고대학에 도서실에 가보면 토라와 탈무드 공부를 질문-답변 형식으로 공부를 합니다. 두 명이상 혹 다섯 명 이하의 학생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어떤 지식과 진리를 완전히 숙달하는 학습법입니다. 히브리어로 친구가 ‘하베르Chaver’(복수 하베림 Chaverim)인데, 미슈나와 게마라의 랍비들은 함께 토라를 연구하는 사람을 하베르라고 합니다. 대화를 통해 진정한 친구 혹 동료가 되며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구도자가 될 수 있는데 이때의 대화법을 하브루타라고 합니다. 교사-학생 관계와는 달리 하브루타 학습에서는 각자가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하여 상대방에서 설명하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면서, 때로는 전혀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학습 파트너’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제4차 산업혁명(인공지능, 로봇, 사물화)에도 하브루타 학습법이 적용되어 논리성, 정확성, 명확성, 융합(fusion), 통전(consilience)을 도출해 내는 교육법입니다. 전화와 인터넷 SNS, 천재교육 프로그램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하브루타는 동급생이나 친구, 넓은 의미로는 가정, 선생님, 부모님, 선배들과 서로 대화함으로써 서로 자기 주도 학습능력을 향상시켜 사고력과 창의력을 함양할 수 있어 학위논문에서도 좋은 방법론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하브루타의 아이디어는 기존의 토라를 함께 하는 학습하는 개념을 넘어서 창조 미래의 교육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를 성경공부, 신학토론, 설교 및 이단상담, 신앙상담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가 하브루타식 학습으로 주님께서는 바른 삶, 신앙, 예배, 교회, 구원을 확실히 가르쳐 줌으로 이 여인은 온전히 변화받습니다.
치유의 하나님, 회복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제단이 이사야 35장의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35:1-2)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제단이 될 줄 믿습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함께 할 때에
(1) 약한 손이 강하여
(2) 떨리는 무릎을 굳게
(3) 겁내는 자를 굳세게
(4)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5)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저는 자는 치유가 되어 사슴 같이 뛸 것이며
(7)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 35:3-6)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되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되듯이 이 땅이 오아시스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 민요에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1) 사막에 샘이 흘러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2)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찬송 242장(통 233장)에서
1)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후렴) 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밝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
2)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의 영광 볼 때에
모든 괴롬 잊어버리고 거룩한 길 다니리
3) 마른땅에 샘물 터지고 사막에 물 흐를 때
기쁨으로 찬송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4) 거기 악한 짐승 없으니 두려울 것 없겠네
평안함과 즐거움으로 거룩한 길 다니리
5)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뿐이라
주님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
성지순례 시 사막이나 광야를 만나면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391장(통 446장)에서 “오 놀라운 구세주”
1)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안전한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후렴)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2)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내 모든 짐 벗기시네
죄악에서 날 끌어올리시며 또 나에게 힘주시네
3) 측량 못할 은혜로 채우시며 늘 성령의 감화 주사
큰 기쁨 중 주님을 찬양토록 내 믿음을 도우시네
4) 주 예수님 공중에 임하실 때 나 일어나 맞이하리
그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리 저 천군과 천사 함께
찬송 183장(통 172장)
1)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이 약속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후렴)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2)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3) 철 따라 우로를 내려 초목이 무성하니 갈급한 내 심령 위에 성령을 부으소서
4) 참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에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바로 설 때 예배가 회복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빈들의 샘물처럼, 오늘도 가물어 메마른 내 심령 위에 성령님의 단비가 풍성하게 내려져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한 여인을 통하여 사마리아에 무너진 교회가 회복되며, 사마리아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로 회복되며, 여인의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도 빈들과 같은 우리의 심령위에 성령의 단비가 풍성하게 임하여 옥토의 밭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주님의 손길이 임하면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빈들의 샘물 역사가 이번 한 주간 동안도 앞으로도 영구히 우리의 교회, 가정, 나라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0장 주일설교말씀] 도마의 나의 하나님 고백(요 2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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