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그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믿는다고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마르다와 예수님 대화(요 11:17-30)
17절 엘돈 운 호 이에수스 휴렌 아우톤 텟사라스 헤메라스 에데 에콘타 엔 토 므네메이오
성 경: [요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큰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토만(Bultmann)은, 여기 "나흘"이란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라고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 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트만(Bultmann)의 이 학설은,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요한복음 저자가 유대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다.
18절 엔 데 헤 베다니아 엥귀스 톤 헤에로솔뤼몬 호스 아포 스타디온 데카펜테
성 경: [요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된 원인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19절 카이 폴로이 에크 톤 이우다이온 엘렐뤼데이산 프로스 타스 페리 마르단 카이 마리안 히나 파라뮈데손타이 아우타스 페리 투 아델푸 아우톤
성 경: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 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Calvin).
20절 헤 운 마르다 호스 에쿠센 호티 호 이에수스 에르케타이 휘펜테센 아우토 마리아 데 엔 토 오이코 에카데제토
성 경: [요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이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또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21절 에이펜 운 헤 마르다 프로스 톤 이에순 퀴리에 에이 에스 호데 호 아델포스 무 우크 안 에테드네케이
22절 알라 카이 뉜 오이다 호티 호사 안 아이테세 톤 데온 도세이 소이 호 데오스
성 경: [요11:21,22]
이 두 구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 한다. 또한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 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 강을 건널 때 얼음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네 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23절 레게이 아우테 호 이에수스 아나스테세타이 호 아델포스 수
24절 레게이 아우토 마르다 오이다 호티 아나스테세타이 엔 테 아니스타세이 엔 테 에스카테 헤메라
성 경: [요11:23,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끝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고, 그때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43-44).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끝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단 12:2에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아께서 그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그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끝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25절 에이펜 아우테 호 이에수스 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 칸 아포다네 제세타이
26절 카이 파스 호 존 카이 피스튜온 에이스 우 메 아포다네 에이스 톤 아이오나 피스튜에이스 투토
성 경: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아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 뮬러(Heitmuller)는 이 구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한 것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27절 레게이 아우토 나이 퀴리에 에고 페피스튜카 호티 쉬 에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데우 호 에이스 톤 코스몬 에르코메노스
성 경: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할 듯이 말한다(39 절).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는, 고후 8:9; 빌 2:7을 참조하여라.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다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같은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독 신자들 가운데 종종 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정연한 것이다. 그것은, 그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그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 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알 수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2)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다. 벧전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보석도 잘 갈아야만 귀한 보석이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에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한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 고로 여러 가지로 연단시키시기를 좋아하신다(신 32:10-12).
28절 카이 타우타 에이푸사 아펠덴 카이 에포네센 마리안 텐 아델펜 아우테스 라드라 에이푸사 호 디다스칼로스 파레스틴 카이 포네이 세
29절 에케이네 호스 에쿠센 에기레타이 타퀴 카이 에르케타이 프로스 아우톤
30절 우포 데 엘렐뤼데이 호 이에수스 에이스 텐 코멘 알르 엔 엔 토 토포 호푸 휘펜테센 아우토 헤 마르다
성 경: [요11:28-30]
마르다가 "가만히...마리아를 불러" - 낸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敬畏)한 증표이다(Calvin).
[예레미야 10장 하나님 말씀]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렘 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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