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장에서 욥은 계속해서 욥의 친구에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의문을 가지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갑자기 어려움이 찾아왔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거룩하게 산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자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인생에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고난을 당할 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을 통해서 나의 모습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고 있는 욥(욥 7:11-21)
11절 감 아니 로 에헤사크 피 아다비라 비차르 루히 아시하 비마르 나피쉬
성 경: [욥7:1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말하며...원망하리이다 - 본문은 앞으로 전개될 욥의 변론(불평)에 대한 서론 격으로서, 욥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심각성으로 인해 심중(心中)에 있는 불만을 기탄없이 하나님께 털어놓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욥의 연설(演說)은 얼핏 보기에 매우 경거망동(輕擧妄動) 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본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는 이러한 인상이 더욱 짙게 풍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욥의 이러한 언사(言辭)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유일성, 그리고 인격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것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인식했으며(하나님의 주권), 또한 그분을 고난에 처한 인간(욥)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하나님의 인격성).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욥은 고난 중에 차라리 영원히 침묵해 버렸거나 아니면 자살 등의 방법으로 고난을 종결시켜 버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말들을 고통에 대한 불평과 비난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한 인간의 신앙적 갈등의 토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절 하얌 아니 임 탄닌 키 타심 알라이 미쉬마르
성 경: [욥7:1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내가 바다니이까 - 어떤 학자는(Delitzsch, Hirzel) 본문의 `바다'(얌)를 나일강으로 보기도 한다. 그 증거는 사 19:5에 쓰인 히브리어 `얌'이 나일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 지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큰 강(예를 들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개 시설이 발전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이들 강들은 우기(雨期) 때에 삽시간에 흘러넘쳐 주변 지역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특히, 상류 지역에 홍수가 날 때에는 강바닥이 파이고 강둑이 유실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천 시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강 수의(首位)를 관찰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처럼 흉용하고 격랑 하는 바다를 지켜보는 것같이 욥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하나님으로부터 감찰받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감찰(보호)이 도리어 현재의 욥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처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바다'와 같이 취급될 만한 하등의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강물이 흘러넘쳐 인명과 재산에 손실을 주는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과(1:1, 8) 사람 앞에서(4:3, 4) 공의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둘째, 그는 바다와 같이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성향(性向)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1:1)이었으며, 더구나 바다와는 구별되는 이성적 피조물이었다.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절에서 욥은 (1)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자기의 주장), (2) 따라서 현재 자기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행위는 부당하며(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 (3) 자신은 그 같은 행위(재난)를 흔쾌히 수납(受納)하거나 끝까지 인내할 수 없다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용이니이까 - 여기서 용은 (1) `고래'(KJV, a whale), (2) `심연의 괴물'(NIV, themonster of the deep), (3) `악어'(Delitzsch), (4) `용'(Lange), (5) `큰 짐승'(박윤선)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중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닌'(*)이 `뱀'(출 7:9, 10, 12; 신 32:33; 시 91:13), `큰 물고기'(창 1:21), `악어'(겔 29:3; 32:2), `용'(사 27:1; 51:9; 렘 51:34) 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은 전절에 나타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그 성질이 난폭하고 거세어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바다의 큰 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욥은 어부(漁夫)가 큰 바다 괴물을 잡을 때 그 시선을 집중하며,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또는 부당하게) 다루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 속에서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며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13절 키 아마리티 티나하메니 아리시 이샤 비사히 미쉬카비
성 경: [욥7:1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 - 극난(極難)한 고통 중에 잠시나마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염원하는 욥의 심경이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드러나 있다. 그의 병은 발병(發病)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다(3절). 이 기간 동안 욥은 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러나 병이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세인(世人)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 역시 그가 갈구하던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도리어 전신에 퍼진 피부병이 밤중에 발작(發作)을 더 심하게 일으켜 그는 속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할 형편이 되었다(4절). 어느 한순간에도 영육의 평안을 갖지 못했다는 욥의 고백 속에서 그가 겪은 고통의 실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4절 비히타타니 바할로모트 우메헤지요노트 티바아타니
성 경: [욥7:1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심신의 질곡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수면과 평안이다. 욥 역시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13절).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잠과 휴식이 아닌 불쾌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꿈'과 `이상'을 사단의 역사(役事)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Adam Clarke). 사단이 욥을 칠 수 있는 전권(全權)을 하나님께로 부여받았다(1:12; 2:6)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욥의 병고(病苦)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후유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특히 정신적 갈등을 동반하는 병자에게는 악몽(惡夢)과 환영(幻影)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욥은 병중에서 안식과 평안을 취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도리어 악몽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15절 바티비하르 마하나크 나피쉬 마베트 메아치모타이
성 경: [욥7:1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 성경에서 `뼈'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 실례로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창 2:23)로, 라반이 야곱을 `나의 골육'(창 29:14)으로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삼하 5:1; 사 38:13 등). 그런데 본절에서는 욥이 오랜 질병으로 말미암아 몹시 수척해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16절 마아시티 로 리올람 에히예 하달 키 헤벨 야마이
성 경: [욥7:1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 여기서 `생명'은 문자적으로 `목숨', `삶'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현재 처한 욥의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욥이 자신의 생명(삶)을 혐오한 것은 (1) 질병의 악화(5절), (2) 정신적(신앙적) 고통의 심화(13-15절), (3) 회복의 가능성 전무(全無)(7,8절)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욥이 강력하게 삶을 저주하고 죽음을 희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간구하는 욥의 고투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나를 놓으소서 - 절망의 한계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원초적 신앙을 견고히 고수하고 있는 욥의 자세를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삶(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욥이 생사(生死)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음을 드러내 준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일찍이 그가 사단의 시련을 받았을 때부터 피력되었으며(1:21), 그의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서도 보였었다(6:4). 이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참 신앙이라 하겠다.
17절 마 에노쉬 키 티가딜레누 비키 타쉬트 엘라이브 리베카
18절 바티피키데누 리비카림 리리가임 티비하네누
성 경: [욥7:17,1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본문은 시 8:4; 히 2:6-8과 내용상 유사하다. 그러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시편 기자 및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과 다르다. (1) 동기(상황) : 욥의 고백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절망과 한탄조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기쁨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2) 의도 : 욥의 고백은 실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지속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19절)에 대한 원망의 토로이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가지의 고백은 실로 보잘것없는 인간을 마치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특별히 여기사 권고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화살과도 같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으며(6:4), 그분의 눈길(관심)이 존속하는 한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한 죽음(3장)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크게 여기사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가텔레누'는 `창대케하다'(창 12:2), `더 크게 하다'(왕상 1:37), `(명성, 지위 등을)존귀하게 하다'(대상 29:25), `(키를) 자라게 하다'(사 44:14)등 다양하게 쓰였다. 여기서는 `존귀하게 하다'(magnify)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벌레와 같이 작은 존재(25:6; 시 84), 하나님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이 미천한 존재(시 90:10; 전 8:8)인 인간이 이렇듯 존귀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축복일진대 욥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도리어 불평과 원망의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가 당한 고난의 심각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마음을 두시고 - 히브리 관용법에 따르면 이 표현은 `관심을 기울이다'(pay heed to), `배려하다'등의 뜻이다(출 7:23; 삼상 4:20; 시 48:13, 14).
19절 카마 로 티쉬에 미메니 로 타리페니 아드 빌리이 리키
성 경: [욥7:1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나의 침 삼킬 동안 - 18절에 나타난 `아침마다', `분초마다'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은 18절의 그것보다 더 세분된 시간을 가리킨다. 즉, `침 삼킬 동안'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18절에서 시작된 과장법적 표현이 본절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서 매 순간마다 고통을 당해야 하는 욥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20절 하타티 마 에피알 라크 노체르 하아담 라마 사미타니 리미피가 라크 바에히예 알라이 리마사
성 경: [욥7:2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하 아담 노첼)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 관심과 그의 백성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사 27:3). 이 표현이 성경에서는 `지키는 자'(시 25:10), `보호자'(시 31:23), `포도원지기'(사 27:3), `파수꾼'(렘 31:6), `상직군'(27:18)등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는 공히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지배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도리어 부담과 불평의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감찰하시는 주가 계시는 한 그는 자기의 뜻대로 죽음을 택할 수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감찰은 도리어 그이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범죄 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극히 미천한 존재인 인간(욥)의 범죄가 초월적이고 광대하신 하나님(시 145:3)께 아무런 영향이 끼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까닭에 인간의 선악 간의 행위(22:2-4; 35:5-8)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며, 조그마한 범죄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죄의 심각한 본성을 알고 있었다. (2)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철저히 경건 생활에 전력했던 욥이 그토록 큰 환난을 당한 데 대해 깊은 의구심을 나타낸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맥상 비교적 타당하게 여겨진다.
21절 우메 로 티사 피쉬이 비타아비르 에트 아오니 키 아타 레아파르 에쉬카브 비쉬하리타니 비에네니
성 경: [욥7:2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내 허물...내 죄악 - 이 말은 지금까지 전개된 욥의 고백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의심했을 때에도 자신은 결코 그 같은 의심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거듭 주장한 바 있다(6:24).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욥의 변론의 범죄 : 욥은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심한 독설(毒舌)을 여러 차례 토로하였다(3장). 이러한 언설(言說)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비신앙적인 것으로 지적받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욥은 자신의 말이 신앙의 길에서 일면 이탈되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2) 인간의 원초적 죄성 : 욥이 무흠 한 이물로서 `자신의 의'(자기 의)를 주장하기는 하였으나(6:24) 원론적 측면에서 볼 때 그를 포함한 모든 인생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직시하였다(9:2). 물론 이러한 그의 인식이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과 죄성을 인식하는 차원, 그리고 행위가 아닌 전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신 득의(以信得意)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흙에 누우리니 - 이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날로 악화되어 가는 병고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흙에 눕다'는 표현은 `자다', `흙으로 돌아가다'(창 3:19)는 표현과 더불어 인간의 죽음을 나타내는 히브리 관용 어법 중의 하나이다.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아직껏 욥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시기가 너무 늦을 것이라는 예감, 그래서 자신은 그 구원을 입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갈 것(6-10절)이라는 생각이 욥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한 반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욥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고로 그 구원을 베푸실 시기가 돌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주어진 사단의 시험(2:4-6)이 온전히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갖고 계셨다(42:8). 바로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욥의 신앙은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욥은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고난 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 그를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했어야 마땅하다.
[고린도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고후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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