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고린도후서 성경좋은말씀] 마음에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5)

성령의 능력 2023. 1. 2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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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영적 직분에 대해서 말씀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다. 마음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새겨주셨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마음에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5)

 

Ⅰ. 바울은 자기를 자천하는 것 같음을 사과한다. 고린도에는 바울의 명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신실성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다음을 말한다.

1. 바울은 거짓 사도와 교사들이 한 것 같은 말의 추천이나 천거서가 필요 없었다(1). 바울이 아무리 적고 그를 아무리 경멸하더라도 그들 가운데서 행한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2.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참다운 추천이요 증거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이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것이 바울이 가장 기뻐하고, 소중한 추천서이었다. 그들은 '그의 마음에" 기록되었다. 이것을 때때로 호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교역자들은 자기들이 전도한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쓰여진 추천보다 더 기쁘고 더 좋은 추천은 없다.

 

Ⅱ. 바울은 자기를 높이지 않으며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주의한다.

1.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한다(3절). 사도나 다른 동역자들은 도구에 불구하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좋은 것의 주이시다. 그리스도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의 가문에 부어졌고 이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 같이 돌비에 쓴 것이 아니고 마음에 기록된 것이다." 이 마음은 돌과 같은 마음이 아니고 부드러운 육비이다. 육적인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부드럽고 새로워진 마음이다. 은혜로운 약속의 마음이다.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계약의 법궤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손으로 쓰여진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울이 기뻐한 소망이었다.

2. 바울은 어떤 찬양도 자기들에게 돌리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돌렸다. "우리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요"(5절) 우리는 결코 너희들이나 우리의 마음에 좋은 것은 줄 수가 없다. 우리의 능력은 너무나 미약하여 너희들의 찬양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모든 선한 것의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나 신자에게 있어서 사실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손은 우리에게 만족하지 못하다. 그의 은혜가 만족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신다.

새 언약의 일군(고후 3:6-11)

 

여기에서 바울은 구약과 신약을 비교한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교한다. 바울과 동역자들을 귀하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기" 때문이다(6절).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자랑하는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이다.

Ⅰ. 바울은 신약의 문자와 성령을 구별하기까지 하였다(6절). 신약의 새 일군으로서 그들은 의문 즉 문자의 사역자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문자를 전하는 이외에 그들은 또한 성령의 사역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직분에 수반했다. "의문은 죽인다." 율법의 문자는 죽음의 직분이며 만약 우리가 복음의 문자에만 의존한다면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망에서 사망으로 나가는 냄새일 것이다. 복음의 사역에 동반하는 복음의 성령은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준다.

Ⅱ. 바울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말하고 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을 지적한다.

1. 구약의 직분은 "죽게 하는 직분이며"(7절) 그러나 신약의 직분은 "살리는 직분이다." 율법은 죄와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적대하시는 하나님을 보인다. 복음은 은혜를 보인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을 나타낸다. 이러므로 복음은 율법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율법도 그 안에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모세가 산에서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에 얼굴이 빛났다.

2. 율법은 정죄의 직분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 안에 기록된 것을 행하지 않으면 저주하고 심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의의 직분을 하였다. 그 안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보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보여 준다. 죄의 용서와 영생의 획득이다. 복음이 율법을 너무나 능가하기에 율법의 영광을 없어지게 한다(10절). 태양이 돋을 때에 등불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신약에 비교하여 구약은 빛을 잃는다.

3. 율법은 없어지나 복음은 남게 된다(11절). 모세의 얼굴의 영광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없어진다. 그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진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새롭고 영광스럽게 세상 끝날까지 존속한다.

 

벗겨질 수건(고후 3:12-18)

 

여기에서 바울은 앞에서 말한 것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밝힌다.

Ⅰ. 복음의 사역자들은 솔직하고 명료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모세와 같이 얼굴에 수건을 쓰고 복음을 흐리게 하면 안 된다. 복음은 율법보다 더 명료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 복음에서는 모형이나 그늘로 나타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목사들은 진리와 은혜를 밝게 들어내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지 못하였으나" 우리는 볼 수가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는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이 지적한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수건이 없어지고 모든 모형과 그림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Ⅱ.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보다 복음 아래 있는 자들의 특권과 유익은 아래와 같다.

1. 율법의 직분 아래 사는 사람은 마음이 장님이 되었다(14절). 그들의 마음 위에 수건이 덮여 있었다(15절). 특히 메시아가 오시고 복음이 선포된 후에 유대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그렇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지리라"(16절)고 사도는 말한다. 혹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무지의 수건이 벗어지고 마음의 어두움과 굳음이 제거되고 치료된다.

2. 복음을 즐거워하며 믿는 자들은 더 행복하다. 왜냐하면

(1) 그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복음 아래에서 그가 역사하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7절). 의식적인 율법으로부터 자유며 부패의 노예로부터 자유며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유며 기도의 자유이다. 마음이 자유롭고 하나님의 명령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2) 그들은 "빛"을 가지고 있다.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본다"(18절). 이스라엘 백성은 어둡고 무서운 구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울 안에서와 같이 밝게 그리고 편안하게 주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얼굴과 얼굴로 모세와 이야기하신 것이 모세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벗은 얼굴로 그를 볼 수 있다.

(3) 이 빛과 자유는 변혁의 힘이 있다.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은혜가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우냐? 우리는 복음으로 우리의 형상이 변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성질로 변할 때까지 안주하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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