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성경공부 중에서 별세의 증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중표 목사님께서 별세의 증인에 대해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별세의 증인(사도행전 7장 54~60절, 22장 20절)
이중표 목사
창조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 많은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저는 전 성경에서 한 말씀을 택하라고 한다면 사도행전 1장 8절을 택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중요시하지만 사실은 그 말씀의 핵심은 결국 증인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직 내 안에 예수가 살아계신 것을 증거 하는 사람이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장 8절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은 천지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루신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스(순교자)’인데 이 말에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증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증인’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증인의 큰 계획을 가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실 때 저들을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사43:10)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참되고 충성된 증인(계 3:14)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애를 통해 십자가에서 피 흘림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증거 한 참된 증인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 구원의 지상 완성입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최후의 약속이면서 최대의 축복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 독립 운동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착취당하며 억울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자유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걸고 제자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세월 고대하던 인자, 대망의 메시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서럽게 살아가는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 왕국을 회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세계를 지도하는 종주국이 될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자들에게 빵을 먹였습니다.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수많은 민중이 환호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권능의 주님을 보면서 민족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메시아로 여기며 희망을 가지고 저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시 전 세계 권력의 상징인 로마의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제자들은 실망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며 저들은 좌절했습니다. “아, 대망의 메시아가 아니었구나!”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저들은 다시 한번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할 때구나, 죽었다가 사신 그리스도, 그분은 능히 이 일을 행할 것이다”라고 기대를 가진 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행 1:6)
저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이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모든 기대를 걸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8).
여기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로 대답을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에게 권능이 온다.”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 “내 증인이 된다.” 이 세 가지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이런 대답을 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큰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망의 메시아를 통해 힘을 기대했고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했고 이제 민족의 독립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들은 조그마한 국토의 회복을 얘기한다면 나는 너희에게 땅 끝까지의 세계를 약속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점령했습니다. 로마의 정치철학에서 힘이 정의였습니다. 이런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제자들은 힘을 절대적으로 갈구했고 힘 있는 사람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로마의 권력과 바꿀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속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주는 힘은 땅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이다.”
로마 황제의 힘은 세계의 한 모퉁이 유럽, 중동 지역, 아프리카 일부에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은 땅 끝까지 가는 무한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되면 두 가지 큰 비전을 갖게 됩니다. 하나는 공간적인 비전으로 넓은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시간적인 비전으로 땅이 끝나는 세계까지 보게 됩니다.
지금 제자들은 공간적인 땅 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땅 끝은 지중해의 어느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세계를 생각했고,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제자들에게 감추어진 비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는 땅 끝인 죽음의 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로마로부터의 조그만 국토의 독립을 말하나 나는 전 세계를 너희에게 주노라.”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비밀을 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을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강대국 사이에서 언제 침략을 당할지 모르는 위기에 놓인 중동의 좁은 나라에 독립을 주는 것보다 더 큰 나라를 주기를 원했습니다. 전 세계의 땅 끝을 비전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의 신비한 비밀을 세계를 다니면서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의 넓은 세계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넓은 땅, 살기 좋은 세계는 캐나다, 미국, 남아메리카, 호주, 뉴질랜드 등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선교사들이 들어가 세운 나라들입니다.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유대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네게 주리라”라고 한 약속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젖은 푸른 초장의 양 떼들에게서 짜는 것이요, 꿀은 꽃밭에서 따는 식품입니다. 꽃 피고 푸른 초장이 있는 젖은 꿀이 흘러넘치는 땅 캐나다, 미국, 남아메리카, 호주, 뉴질랜드 등에 선교의 큰 비전을 가지고 땅 끝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젖과 꿀은 영육 간의 축복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심령에도 말씀의 젖과 꿀이 흘러 은혜가 풍성합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소유하게 됩니다. 참으로 신비한 비밀입니다.
저는 미국과 캐나다에 집회를 하러 갈 때 ‘이 살기 좋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복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자 없는 땅을 먼저 차지한 저들이 한없이 부럽고 한편으로는 몹시 아쉬울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한 사람들에게 이 땅을 예비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해서 모두 흔들리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를 회복하는 날이 어느 때입니까?” 이때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좀 더 큰 땅 끝의 복을 주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힘은 성령이 주는 힘입니다. 경제로부터 오는 힘도 아니요, 물질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힘입니다. 여기 ‘내 증인’이라는 말에서 ‘내’는 ‘주님’을 말합니다.
이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언은 사도행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역사의 현장에 남겨 놓은 위대한 증인은 바로 별세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별세신앙으로 고백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증인’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주님께서 우리를 그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인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이전의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증인은 말로 증거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 몸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을 받은 이후 제자들은 자신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고 담대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증인은 진리에 대한 자기의 증거를 말이나 행동으로써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증거 행위를 증언이라고 합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 말은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이 용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증거 한다는 의미이므로 처형당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증인은 순교자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곧 죽음을 자원하는 순교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를 예견하셨습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 땅 끝으로 갈 것을 아셨습니다. 땅 끝은 공간의 세계가 아니며 제자들은 땅이 끝나는 감옥으로 들어가게 될 것과 자기 죽음을 택하는 길로 갈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별세를 체험한 자에게 주시는 능력이었습니다. 증인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정의감이나 영웅 심리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을 고백하는 별세의 신앙에서 솟아오르는 힘으로 하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증인이라는 말은 ‘마르투스(순교자)’라는 말이며, ‘예수의 증인’이며 또한 ‘자기 별세의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별세한 주님을 나의 별세로 증거 할 때 증인이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서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이고, 하나는 증인입니다. 신자는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신자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후에는 주님과 함께 별세를 사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은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만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 때 우리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증인은 자기의 몸으로 주님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입으로 증거하고 몸으로, 삶으로, 생활 현장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 끝’은 내 삶이 끝나는 곳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죽는 날까지 예수의 삶을 나타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증인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 몸으로 증거 했습니다. 저들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증인은 영광스러운 사람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는 유익하고 자기는 큰 손해가 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영광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님이 딸에게 물었습니다.
“딸아, 사람이 사는 목적이 뭐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항상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고맙다. 네가 잘 알았다. 인간의 사는 목적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을 영화롭게 하며 사람을 항상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한다면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실패할 때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망한 것이고 실패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별세시켜 내 안에 오직 예수만 살아 계신다면 성공이나 실패가 모두 예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증인은 사나 죽으나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오직 예수를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예수가 전부가 된 사랍니다. 사는 목적이 예수요, 죽는 목적도 예수입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순교자는 죽는 것이 아니요, 죽음으로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때문에 죽으면서 예수를 증거 하지 못하면 증인(순교자)이 못됩니다. 증인은 예수를 증거함으로 자신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또 위대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두 가지는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존재를 위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난해도 위대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실패해도 자기 존재를 위대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위대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사람은 예수를 많이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번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순교자의 열전」이라는 책인데 80명의 순교자에 대해 읽었습니다. 80명의 순교자를 읽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죽는구나!”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그 사람들의 감동적인 최후의 순교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오직 주님을 부르짖으며 숱한 고난 속에서도 비겁하지 않고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보였습니다. 죽이는 자를 용서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끝까지 기도하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별세의 사람들이었기에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전을 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네가 죽는 때 네 존재는 위대해진다”라는 약속입니다.
땅 끝은 땅이 끝나는 세계, 곧 죽음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곧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영광을 흠모해야 하며 스스로 순교자의 비전을 가지고 전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모두 순교자의 영광의 길로 가게 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바울, 도마 등 열두 사도들은 땅 끝으로 갔으며 증인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증인은 행복한 사람
증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며,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웃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이 행복을 노래하고 이 감격을 고백하고 죽는 사람들은 별세의 사람들이고, 하늘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자기 죽음을 선언한 별세의 사람들이라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미련은 두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삶의 전부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빈부귀천 어느 곳에서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에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땅 끝 행복입니다.
지금까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서 금 면류관을 받는 것이라고 미화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은 순교자가 되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순교를 현실적으로는 불행한 삶으로 여겨왔습니다. 순교의 길에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하니 누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순교는 행복의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을 증언할 수 없는 순교는 기독교의 순교가 될 수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의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잠들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행 7:60). 잠들었다는 것은 안식이 이른 것을 의미합니다.
순교자는 산 자의 신앙을 가졌기에 순교하는 곳은 산 자의 행복을 최후로 증거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누린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의 행복을 소유한 자만이 순교자의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행 5:41). 이는 별세에 사는 증인의 행복을 보인 것입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었고 세상에 대해 죽었으므로 이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예수 믿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산 자의 행복을 현재 누리고 있는 사람이요, 그의 죽음은 이제 영원한 행복에 참여하는 확증으로 나타납니다.
증인 스데반
성경에 나타난 영광스러운 증인의 모습은 스데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순교자(증인)의 모습입니다. 스데반은 그의 순교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을 했고, 그가 숨질 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많이 닮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을 듣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설교로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할 때 저희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를 갈며 달려들었습니다. 이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온몸을 돌로 치니 살이 찢기고 터져 그는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때 스데반은 입을 열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면류관이란 뜻입니다. 스데반은 그 이름대로 증인의 면류관이며, 하늘나라 면류관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교회 성장보다 스데반의 순교에서 위대한 교회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스데반은 계속 존재해야 합니다. 스데반을 계속 배출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베드로의 목회는 스데반을 증인으로 만들어 놓은 위대한 목회의 산 증거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회는 교회에서 스데반을 양육하는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우연히 나온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난 표입니다.
지금 이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 정신은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날린 향기는 2천 년 교회를 생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날린 향기는 2천 년 교회를 생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가시에 찔리고 돌에 찢기고 부서졌으나 그리스도의 향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하는 그 현장에서 살기등등한 핍박자 사울이 스데반의 순교의 향기를 호흡하고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향나무는 찍는 도끼에 향을 묻혀 주는 것처럼 스데반은 사울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마시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장 아름답게 모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2천 년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 스데반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증인 스데반”(행 22:20)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스데반 같은 증인 교회가 되어야 하며, 스데반 같은 집사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으로 2천 년 교회사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또 스데반의 위대한 삶을 눈으로 본 사울은 부름을 받아 전도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데스다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교회 성경공부] 교회의 조직과 임무 (0) | 2021.08.25 |
---|---|
[구약성경 성경공부] 기독교란 무엇인가?(성경 이야기 다니엘서 요약) (0) | 2021.06.24 |
[기독교 교리 성경공부] 칼빈주의 성경관점 (0) | 2021.06.17 |
[잠언 성경공부] 잠언 요약 (0) | 2021.06.11 |
[기독교 교리 성경공부] 신약 구약 성경의 완전성과 무오성 (0) | 2021.06.04 |
[성경인물 성경공부] 창세기 인물(아담 하와 가인 아벨 셋 에녹 노아 아브라함) (0) | 2021.05.13 |
[새신자 성경공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0) | 2021.04.07 |
[레위기 성경공부] 레위기 13장 - 14장 성경 개요 (0) | 2021.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