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마태복음 18장 예수님의 말씀]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마 18:1-35)

성령의 능력 2021. 12. 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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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용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복음은 주님을 높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와 같은 원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용서할 일이 있다면 용서하면서 살아가라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마 18:1-35)

 

1-14, 겸손을 가르치심

[1-3]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 . .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쭈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크다는 원어(메이존)더 크다혹은 가장 크다는 뜻이다(BDAG, KJV, NASB, NIV).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교만, 세상적, 육신적 명예심이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주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20: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11:29).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2: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많이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교만한 자는 높은 자에게는 아첨하고 낮은 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25:31-46) 이 진리를 좀 더 자세하게 증거하셨다. 그는, 그의 형제들, 곧 그의 종들과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며,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며, 또 그의 이름을 가진 소자(小子) 하나의 영접 여부가 영원한 구원과 멸망을 나누며, 의인과 악인, 영생에 이를 자와 영벌에 던지울 자를 나눌 잣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표가 된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영접하며 서로를 섬겨야 한다.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범죄케 하는 것이 큰 죄가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는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경고가? 남을 범죄케 하는 것보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즉 남을 살리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지 남을 범죄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남을 범죄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있다. 우리는 남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바쳐질지언정, 남을 죄 짓게 하는 데 바쳐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단을 가르친다든지, 위선적 말과 행위로 남에게 참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한다든지 술취하고 음란한 풍조를 사회에 조장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8-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우리의 손이나 발, 우리의 눈이 우리를 계속 범죄케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계속 범죄하여 지옥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지 않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불구가 때때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일 수 있다. 건강한 몸으로 죄만 짓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더 복되다.

만일 우리가 불구의 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지백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을 깨닫자.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찍어버려야 했을 지체, 뽑아버려야 했을 지체를 가진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이 아니니이까?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 . . .

주께서는 또, “삼가 이 소자(小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소자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 아이의 생명이든, 혹 태아의 생명일지라도,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 질서와 직분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것이 어린아이의 인격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전통본문).

전통본문에는 11절에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는 말씀이 있다.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주께서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제자된 우리도 같은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주를 따르는 자들이 어찌 남을 범죄케 하여 그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이가 심각한 신앙적, 도덕적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거절하거나 업신여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고 권면하여 그를 구원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12-13]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5:3-7잃은 양의 비유와 비슷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는 것이 목자의 심정이요 그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은 매우 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린 한 영혼이라도 우리의 실수로 인해 범죄하게 하고 잃어버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 . . .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 어린아이나 청소년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교회에서 큰 자는 형제를 섬기는 자이다.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했다(12:10).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들은 어린 신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한 영혼, 한 어린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힘쓰자.

15-20,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전통본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다.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 죄가 말로 우리를 잘못되게 비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돈을 떼어먹는 일일 수도 있다. 교회 생활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사람의 인격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없지 않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께서는 그 대처 방안을 말씀해 주신다.

첫째로,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책망]하라.” 개인적 책망 혹은 충고가 첫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문제를 남에게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이것은 또 우리가 저런 자와는 만날 것도 없어!’ 하고 그를 정죄하고 그와의 교제를 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내포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들고 수고가 든다. 또 잘못하면 마음 상하는 말을 한마디 더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참된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이 내포하는 바이다. 이것이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증참한다고 번역한 말은 확실케 한다,’ ‘확증케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도록 해야 한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 . . .

주께서는 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나 회중 앞에서 판단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적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겨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즉 그는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교회 밖에 속한 외인(外人)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는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될 것이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적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을 가리킨다. 이 권징은 비록 땅에서, 즉 지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효력을 가진다.

[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 . . .

또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21-35, 용서에 관해 가르치심

[21-22]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 . . .

예수께서 형제의 범죄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교훈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에게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24-27]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 . .

그 임금이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었다.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이었는가? 한 달란트는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6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3억 6천만원이며, 일만 달란트라면 약 3조 6천억원이 된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었다.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였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말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 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주께서 하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것이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 곧 영원한 지옥 형벌이었다.

그 종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말했지만 실상 그 빚이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갚기 어려울 정도의 금액이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와 형벌을 갚는 데 부족할 뿐이었다. 신약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28-30]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 . . .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일 품삯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달라. 갚으리다”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떠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31-34]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 . . .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주인의 말은 정당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신약교인들은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 . . .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교훈을 주셨다. 용서는 우리가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후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었다(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4:32).

[역대상 9장 주석 설교말씀] 예루살렘의 원 거주자들(대상 9:1-44)

 

[역대상 9장 주석 설교말씀] 예루살렘의 원 거주자들(대상 9:1-44)

역대상 9장에는 사울 왕의 족보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막 봉사를 하던 자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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