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원문 성경강해

[로마서 8장 헬라어 주석 강해] 율법에 정죄받지 않는 신앙(롬 8:1-11)

성령의 능력 2021. 5. 1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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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8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율법에 정죄받지 않는 신앙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면 거부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구원이 취소된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더 거룩하게 사느냐 그렇게 살지도 않습니다.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면서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한 번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사탄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면 자 범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될까 두려워하는 신앙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율법에 정죄받지 않는 신앙(롬 8:1-11)

 

1절 우덴 아라 뉜 카타크리마 토이스 엔 크리스토 이에수 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그러므로 이제 - '그러나 이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뉜 데'그동안 진술했던 내용보다 한 차원 높으나 반대되는 내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술이 라면(3:21), '그러므로 이제'(아라 뉜)는 그동안 진술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위한 한 차원 높은 내용이 전개됨을 시사하는 접속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본 구절 다음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who walk not after th flesh, but after the Spirit, KJV). 이 구절이 4절에 반복되고 있으나 다른 사본들(B, D)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비록 4절이 본절의 의미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수 안에 있는 자'만으로도 본절의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오리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과 같은 첨가가 본절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의해 한정을 받음으로써 성도가 정죄로부터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해방되었다는 선포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본절에서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39)는 신앙 고백적인 선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2절에서 34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2절 호 가르 노모스 투 프뉴마토스 테스 조에스 엔 크리스토 이에수 엘류데로센 메 아포 투 노무 테스 하마르티아스 카이 투 다나투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 본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난제가 발생한다. (1)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단지 '생명'만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2) '생명''성령'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두 가지 난제는 함께 얽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6). 따라서 생명은 성령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원리를 가리킨다. 성령은 이 원리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생명의 성령의 법' 전체를 수식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수식어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된 원천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죄와 사망의 법 - 혹자는 "모세의 법은 올바르나 힘이 없으며 죄의 법은 힘이 있으나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힘이 있고 또한 올바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T.W. Manson). 여기서 맨슨은 '죄의 법''모세의 율법'을 각각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율법을 변호해 주면서 본 구절을 오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바울의 진술에서 '율법''정죄'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할 지라도(7:12) 죄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정죄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이 인간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어떤 사본에는 ''() 대신에 ''()가 사용되고 있다. 7장에서 바울이 줄곧 자기 자신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보다 ''본절에 더욱 어울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7:25절부터 바울은 일반인 주어'우리'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본장에서는 '' 대신 '너희''우리'를 번갈아 가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권위 있는 사본들(B, G)''를 지지하고 있. 따라서 본 구절에서 ''라는 독법(讀法)''보다 더욱 타당하다. 한편 '해방하였음이라'는 표현은 '정죄함이 없나니'란 표현과 일맥상통하지만, 전자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인 반면 후자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3절 토 가르 아뒤나톤 투 노무 엔 호 에스데네이 디아 테스 사르코스 호 데오스 톤 헤아우투 휘온 펨프사스 엔 호모이오마티 사르코스 하마르티아스 카이 페리 하마르티아스 카테크리넨 텐 하마르티안 엔 테 사르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은 죄에게 종노릇 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7:24과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 블랙(M. Black)은 본 구절을 주해하기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도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바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율법을 성취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죄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아스'는 영역 성경에서 '속죄 제물로서'(as an offering for sin, NASB)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to be a sin offering, NIV)라고 번역되기도 했. 혹자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관련지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Harrison, Black). 그리고 초대 교부 중에서도 이 해석을 시도한 사람이 있다(Origen).

그러나 본절뿐 아니라 본장 어느 곳에도 '속죄 제물''제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페리'란 전치사가 '...을 위해' 또는 '...을 인하여'라는 의미보다 '...에 관해' 는 '...에 따라서'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본절은 '죄와 관련해서' 또는 '죄에 관해서'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Lenski).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 본절은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4:15)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죄의 유혹을 받았고 연약함도 경험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그는 범죄치 않으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이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의 유혹과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거룩하신 몸에 죄 정()함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사 인간의 좌와 허물을 대속해 주심으로써 죄많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4절 히나 토 디카이오마 투 노무 플레로데 엔 헤민 토이스 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4

육신을 좇지 않고 -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킨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13)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바울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이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 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 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 - '요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는 '로운 행동', '계명'(NEB), '규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의로운 요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디카이오마'를 '의로운 요구'(the just requirement)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Lenski, Hendriksen, Murray, Stott, Black, Harrison, Barmby).

사실상 본 구절에서 '디카이오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율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문장이 매우 어색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디카이오마'가 '의로운 요구'로 번역되는 편이 매우 자연스럽다.

5절 호이 가르 카타 사르카 온테스 타 테스 사르코스 프로누신 호이 데 카타 프뉴마 타 투 프뉴마토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5

육신을 좇는 자는...생각하나니 - 본절에는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성령'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바울의 저서에 있어서 ''(프뉴마)'성령'을 의미할 때도 있으나 단지 죄의 원리 또는 그 세력과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으며, 본장 전체에서도 ''이 반드시 '성령'으로 해석될 수 없는 곳이 많다.

따라서 여기서의 ''은 성령이 아니라 다만 육신과 대조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의미한다. '육신을 좇는 자'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하면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다.

그리고 '영을 좇는 자'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가는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을 좇는 자'라고 해서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마음으로 원하던 바를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을 좇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한다.

6절 토 가르 프로네마 테스 사르코스 다나토스 토 데 프로네마 투 프뉴마토스 조에 카이 에이레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6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사고(思考)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육신'으로부터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중심적인 생각만이 나온다. 그러나 ''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은 '영의 생'을 가진 자는 오직 영의 일만을 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인간에게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두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7:21-23) 문제는 이 두 가지 생각에 의해 발생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해결에 대한 답을 이미 1에서 언급한 후, 바울은 미리 주어졌던 답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두 생각을 대립시키고 있다.

7절 디오티 토 프로네마 테스 사르코스 에크드라 에이스 데온 토 가르 노모 투 데우 우크 휘포탓세타이 우데 가르 뒤나타이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혀 있는 육신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 도모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 혹자는 본 구절을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의로운 법에 순종치 아니하고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증거요, 는 모든 비참함의 근거다"라고 했다(shedd). 이처럼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자는 자신의 의도가 있든 없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도전하기까지 한다.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굴복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도 없음이라 - 자연인의 전적 불능(不能)과 전적 부패성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질 수 있다.

8절 호이 데 엔 사르키 온테스 데오 아레사이 우 뒤난타이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8

육신에 있는...할 수 없느니라 - 본절은 7절의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된다. 즉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으므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에만 있는 자의 실상(實狀)이다.

9절 휘메이스 데 우크 에스테 엔 사르키 알르 엔 프뉴마티 에이페르 프뉴마 데우 오이케이 엔 휘민 에이 데 티스 프뉴마 크리스투 우크 에케이 후토스 우크 에스틴 아우투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3:16; 고후 6:16). 여기서 바울은 그동안(4-8) 육신의 영을 대립시킨 목적을 밝히고 있다.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즉 성도가 비록 선을 행하기를 원할지라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성도로서의 신분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써 '영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본절에는 성령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성령'='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같은 등식이 보여 주듯이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 분리의 관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Teh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도 가운데 거하시면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하신다(16). 한편 성도'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뿐이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성도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믿게 하시며 또한 그는 성도 안에 계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이기에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자이고(10a)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10절 에이 데 크리스토스 엔 휘민 토 멘 소마 네크론 디 하마르티안 토 데 프뉴마 조에 디아 디카이오쉬넨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8:10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고 말씀하시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17:3)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됨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이신 칭의(以信 稱義)를 근거로 성도의 영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5:18; 6:11). 그러므로 성도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다. 몸은 죄의 도구가 된 육신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영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인해 살았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1절의 '정죄함이 없나니'란 말씀과 2절의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성도가 여전히 정죄받는 신분이라면 아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신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좌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인 ''은 죄의 포로가 된 육신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의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이다.

11절 에이 데 토 프뉴마 투 에게이란토스 이에순 에크 네크론 오이케이 엔 휘민 호 에게이라스 톤 크리스톤 에크 네크론 조오포이에세이 카이 타 드네타 소마타 휘몬 디아 토 에노이쿤 아우투 프뉴마 엔 휘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1

예수를 죽은 자...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본절은 10절의 선포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다. 그 설명을 요약하면 성령이 내주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예수를 사망 권세로부터 살리심같이 다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영이 살아나는 것만을 진술하지 않고 성도의 '죽을 몸'이 다시 산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0절에서 바울은 '몸은 죄를 인하여 죽은 것이나'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죽을 몸이 산다고 진술하고 있다. 형식상으로 볼 때 그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내용면에서 그 두 진술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몸은 죄로 인해 죽는다. 그렇지만 영은 의로 인해 살았다. 이와 같이 죽을 몸도 영이 성령에 의해 살게 된 것처럼 다시 살게 된다.

 

 

[고린도후서 청년주일설교말씀] “보배와 속사람”(고후 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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