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고린도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고후 1:1-24)

성령의 능력 2021. 11. 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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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환난 중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살다 보면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마음이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에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새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고후 1:1-24)

 

1-2, 문안 인사

[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사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뜻이나 결심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따라 강권적으로 그를 부르셨고 이 길로 이끄셨다.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보냄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고(1:1)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것이다(고전 1:17). 그는 디도서 1:3에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에게는 형제 디모데가 있었다. 그는 혈육의 형제가 아니고 주 안에서의 형제요 바울의 조력자이었다.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2:22).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문안하였다. 고린도시에 많은 단체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교회는 그런 인간적 단체들과 다른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고린도시에 국한되지 않고 아가야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포함했다.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한다. 사실, 교회는 아담 이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의 구성원은 성도’(聖徒), 즉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 전까지 죄인으로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거룩케 된 자들이다.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시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범죄할 때 징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 곧 우리와 온 세상의 주인, 주관자, ,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사람의 호의도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곧 값없이 주시는 호의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셨고 또 구원받은 우리의 성화(聖化)와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 전반을 도우실 수 있는 큰 복이다. 또 하나님의 평강도 세상에서 매우 큰 복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일용할 양식, 그리고 사회적 안정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복이다. 그것은 실상 천국의 특징이다. 성도가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은 천국의 복의 시식(試食)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셨고 우리를 단번에 거룩하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사모하며 누리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의 해결이며 평안은 세상에서 영육의 귀한 복이다.

3-11, 위로의 직분

[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자비들]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신다.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20:17).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자비들]의 아버지이시다. ‘자비들이라는 원어는 많은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많으신 아버지이시다. 또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위로는 본문의 중심 주제이다. 세상은 고통과 환난, 낙망과 슬픔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큰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평안과 용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따라 능력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외아들의 장례식에서 하염없이 울던 나인성 과부에게 그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위로해주셨듯이, 하나님의 위로는 무한하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 중에서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로하셨다. 성도에게는 환난이 있으나 위로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위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위로, 즉 하나님의 영육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의 위로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순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든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환난 중에서 위로하신 것은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한 자마다 고난당하는 다른 성도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주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7] 그리스도의 고난[고난들]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그리스도의 고난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즉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넘치게 경험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위로도 넘치게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고난들도 허락하시지만, 결코 자기 백성을 미워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시다. 그는 정하신 때에 풍성한 위로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고난도 받고 위로도 받는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할 뿐 아니라, 특히 남을 돕는 데 유익하다.

사도들이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것같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위로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떠한 고난도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환난 중에 사도들을 위로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하다는 말은 환난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과 구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성도들에게 시시때때로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의 위로도 확실히 있을 것이다!

[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언급한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았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 그것은 죽음의 문앞에까지 간 환난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의 때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때때로 성도들에게 이런 극심한 고난이 닥쳐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위로의 줄을 다 끊어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게 하시는 때가 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는 때가 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오늘날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들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1)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게 만든다(12:10-11). (2)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8:2). 그러나 고난의 주요한 또 하나의 목적은, 본문의 말씀대로, (3)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많은 고난들을 통해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10-11]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쉰위푸르군톤)[돕고 있도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내어 주셨다. “또 건지시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현재형이다(뤼에타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도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는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시고 또 건지실 것이라는 뜻이다. “의지하여 바라노라는 원어(엘피카멘)는 완료형으로서 소망의 확실함을 보인다.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이다. 그가 오늘 우리 곁에 계신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원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돕고 있다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성도들은 복음사역자들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협력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사역자들 자신들의 기도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루게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성도의 삶에는 많은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 중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많은 위로가 있다. 고난도 있지만, 위로도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고난 받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의 고난은 여러 가지 유익도 있다. 고난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또 겸손하게 한다. 또 극심한 고난은 무엇보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 사역과 그 일꾼들을 위해 기도로 도와야 한다. 복음 사역에는 많은 고난이 있지만, 기도는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사역자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룰 것이다.

12-24, 전도 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함

[12-14]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거룩함이라는 원어(하플로테스)는 ‘단순함, 신실함, 솔직함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단순하고 솔직하게 행동했고 특히 성도들을 대할 때 그러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지혜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 육체의 지혜는 간교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위선적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처신하며 겉보기는 그럴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진실한 척하나 진실이 없고, 의로운 척하나 의롭지 못하고, 사랑하는 척하나 사랑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간교하거나 기회주의적이지 않고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이지 않고 사람의 꾀나 세상적 수단 방법으로 하지 않고 단순하고 솔직하며 진실하고 신실하게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심정은 편지로 다 표현되었다. 그들이 읽고 아는 것이 바울의 마음 전부이었다. 그 이상의 것도, 그 이외의 것도 없었다. 숨겨진 다른 마음은 없었다. 이것이 단순함, 솔직함, 진실함이다. 오직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교인들의 자랑이 되는 것을 원했다. 참된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전도자들에게 영광과 자랑이 될 것이며, 전도자들은 그들에게 영광과 자랑이 될 것이다.

[15-20]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사도 바울의 본래의 여행 계획은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에 가서 유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여행 계획은 쉽게 하고 쉽게 아니오하는 경솔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신적, 인간적 계획이 아니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음직하시며 신실하시듯이 자신의 말도 경솔함이나 불신실함으로 한 것이 아니고 신실함으로 한 것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그들이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경솔하게 예 하고 아니오 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는 불신실하신 분이 아니셨다. ‘저에게는 예만 되었다는 말은 오직 저에게는 예가 있었다는 표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하시고 끝까지, 죽기까지 그것을 지키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하셨다.

사도 바울은 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의 약속 곧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약속이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다. 그것은 영육의 복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이며 아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의존한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가 우리 대신 죽으셨음으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심은 특히 그가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사실에서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주셨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 영역을 나타낸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성을 가진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 새로워짐과 거룩한 변화를 주신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36:25-26; 4:22-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를 인치셨다. 그가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가 친히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또 그 구원하신 자들을 견고케 하신다. 물론 이 진리는 성도의 안일함이나 방종의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인치심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 안에 이미 거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또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는 없고 단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육의 모든 기관과 기능들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성도의 구원의 보장은 삼중적(三重的)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과 그의 중보사역의 효력이며,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본문은 이 세 번째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시며 구원의 보증이시다.

[23-24]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하면서 자신을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이단자들이나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은 그들의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교인들의 믿음을 주장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 하나님의 말씀만, 신구약 성경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주관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과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이든지 교사나 권찰이든지 다른 이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에 굳게 서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단순하고 솔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간교하거나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처신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에게 마땅하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성령을 보내어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셨다. 그는 우리를 끝날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지키실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연약한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변적 선택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과 성령의 인치심에 의존한다. 우리는 감히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남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바울처럼 겸손히 다른 이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해야 한다.

[욥기 6장 히브리어 성경 설교말씀] 죽음을 원하고 있는 욥(욥 6:8-13)

 

[욥기 6장 히브리어 성경 설교말씀] 죽음을 원하고 있는 욥(욥 6:8-13)

욥기 6장에서 욥은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에 욥이 대답을 하면서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육체적 고난이 너무나 심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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